“밤중에 ‘깜짝쇼’로 실시됐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금융실명제’ 실시가 전격 발표되던 날을 이렇게 회고한다. 실제로 금융실명제는 1993년 8월12일 저녁 8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 발동으로 도입됐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두 달 전부터 과거 법률 제정에 관여했던 재무부 공무원 등을 불러모았다. 김용진 재무부 세제실장을 팀장으로 14명의 실무진이 과천(주공아파트 5단지 304호)과 강남(휘문고 앞의 한 건물) 등지에서 극비리에 ‘거사’를 추진했다. 실무진 일부는 해외출장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합숙에 들어갔다. 강남 작업실에는 ‘국제투자연구소 사무국’이라는 위장간판이 내걸리기도 했다.
금융실명제 도입이 한편의 영화처럼 긴박하게 이루어진 것은 정치권과 재계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반대파의 득세가 이미 여러 차례 금융실명제 실시를 좌절시킨 바 있기 때문이다. 금융실명제가 차명거래를 용인하는 ‘반쪽짜리’ 법안으로 도입되는 오점을 남기게 된 것도 이런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계좌의 실소유주와 이름만 빌려주는 명의자가 합심해서 만드는 차명계좌에 대한 규율을 담지 않으면서, 은밀한 금융거래를 하려는 이들에게 일종의 ‘퇴로’를 열어준 셈이다. 제도의 허점을 바로잡기까지는 무려 21년이 걸렸다.
■ 긴급명령으로 힘겹게 도입…차명거래 규율 안해 원래 금융실명제는 ‘장영자·이철희 부부 어음사기’ 사건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1982년에 재무부가 ‘7·3 조치’를 발표하면서 설계됐다. 7000억원대의 거액 사기사건이 벌어지자, 어음거래를 중심으로 한 사채시장을 양성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받은 것이다. 장씨는 자금압박이 심한 기업들에 자금을 조달하면서 빌려준 돈의 몇 배에 이르는 약속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서 할인하는 수법을 썼다. 어음의 매수자와 매도자를 실명으로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자금 출처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 1년 만에 ‘차명거래’를 통한 제도의 허점을 드러낸 장본인 역시 장씨였다. 사기사건으로 10년을 복역하고 나온 그는 1994년 다시 100억원대의 어음 사기사건으로 구속됐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이 장씨에게 불법대출을 해주거나 차명계좌를 개설해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1994년 1월31일 국회 재무위에서 여야 정치인들이 벌인 공방은 불과 얼마 전까지 국회 정무위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야당 의원들은 “수십억원의 예금을 미끼로 차명거래를 요구할 때 이를 마다할 은행이 얼마나 되겠느냐. 장씨 사건은 법률의 허점에서 생긴 만큼 차명거래를 막을 수 있는 대체입법이 시급하다”고 몰아쳤다.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도입
사무실에 위장간판 내걸고
두달간 극비리에 실무팀 운영
“밤중에 ‘깜짝쇼’로 실시” 회고
정치권·재계등 반발 억누르려고
차명계좌 용인하는 오점 남겨
재산 은닉·탈세 목적으로 악용
‘선의의 차명거래 보호’ 명분으로
제도개선 추진 번번이 불발
이번 법개정 실효성에 촉각
‘차명거래 원칙적 금지’ 원안 후퇴
‘불법행위 목적일 때만 처벌’ 한계
“공정과세 실현 병행돼야” 주문도
당시나 지금이나 금융실명제법은 실명거래를 위반한 금융회사 직원에게만 과태료 500만원을 부과해왔다. 금융회사에만 고객의 실명을 확인하도록 하는 의무를 부여했을 뿐, 정작 계좌 소유주(거래 당사자)에게는 실명거래 의무를 부여하지 않은 셈이다. 차명거래를 통한 불법행위가 검찰 수사로 드러나면 상속·증여세법이나 조세범처벌법, 범죄수익은닉 규제 및 처벌법 등 다른 개별법을 통해 처벌을 받게 되지만, 이런 법망만 비켜갈 수 있다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아온 것이다.
재벌그룹 총수 일가와 정치권에서 비자금 조성 용도의 차명계좌 개설이 빈번해진 것도 이런 허점을 노리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재산을 은닉하거나 상속·증여 과정에서 탈세를 하려는 목적으로 차명계좌를 만들었다.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에서 특검은 이건희 회장의 재산을 관리하던 재무라인 임원들이 차명계좌를 무려 1199개나 개설한 것으로 확인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대표적 인물이다. 수천개의 차명계좌를 활용해 ‘비자금 세탁’을 해온 전씨 일가는 노숙인의 이름을 빌려 계좌를 만드는 과감함을 보이기도 했다.
차명거래로 인한 부작용이 끊이지 않았지만 제도개선 추진은 번번이 불발로 그쳤다. 흥미로운 대목은 금융실명제 도입 당시 차명거래에 대해 규제하지 않은 논거가 20여년 동안 변함없이 작동해왔다는 점이다. 친인척 간에 이루어지는 ‘선의의 차명거래’와 탈세 등으로 처벌 대상이 될 만한 차명거래를 일일이 구분해서 입증하기 어렵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1993년 당시 재무부 사무관으로 대통령 긴급명령의 초안을 작성한 최규연 저축은행중앙회장은 “1980년대 도입을 준비할 때부터 다각도로 검토했지만 차명거래는 규제하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에 법안에 일부러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난 2010년 한화그룹 비자금 사건 수사 등으로 차명계좌가 다시 도마에 오르자,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차명거래를 보완하는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렇다 할 대책은 나오지 못했다. 기재부는 “가족, 종중, 친목모임 등 선의의 차명거래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어 신중히 검토할 문제”라는 태도를 견지했다.
‘선의의 차명거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 속에 불법적 차명거래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도 다수 생겨났다. 새정치민주연합 민병두 의원은 2006~2013년(2분기 기준)에 차명계좌를 통해 대주주에게 부당대출을 해주는 등으로 저지른 저축은행 비리 규모가 6조7546억원에 이른다는 분석자료를 발표한 바 있다.
■ 법개정 실효성에 촉각…공정과세 뒤따라야 이런 맥락에서 지난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은 차명거래에 대한 규율을 처음으로 명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누구든지 불법으로 재산을 숨기거나 자금세탁을 목적으로 차명거래를 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된다. 예컨대 삼성 비자금 사건이 또다시 반복된다면, 이건희 회장은 차명계좌 개설을 도운 수많은 임직원들을 범법자로 만들 각오를 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불법 차명계좌를 개설해준 금융회사 및 임직원에 대한 제재 수위도 높아지기 때문에 종전처럼 차명거래를 묵인하거나 방조하기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차명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 계좌 명의자의 소유로 추정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실소유주가 자기 돈을 찾기 위해서는 재판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는 점에서 ‘합의차명’을 줄이는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법개정에 대해 전경련 관계자는 “과거 대기업에서 차명거래 관행이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그룹 쪽은 이번 법개정에 대한 의견을 묻자, 답변을 꺼렸다.
일부 전문가들은 법개정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다. 애초 야당이 국회에 제출한 법안은 차명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이었다. 대신 선의의 차명거래를 예외적으로 구제하도록 하는 입법안을 냈다. 이런 방안과 비교해보면, 불법행위를 목적으로 한 차명거래만 금지하도록 한 개정 법안은 일종의 타협안이라고 볼 수 있다. 차명거래가 결과적으로 불법 목적이라는 점이 규명되지 않으면 처벌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차명거래에 대한 규율을 세우는 동시에 그에 따른 공정과세를 실현하는 일이 병행돼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김상조(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금융실명제가 궁극적으로 세금부과를 위한 법이라는 인식이 확립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금융정보분석원(FIU)이 확보한 의심거래 정보에 대해 국세청이 사실상 아무런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