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자본주의에서의 불평등 문제를 다룬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는 이 책에서 “과세는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문제다. 아마도 모든 정치적인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할 것이다. 어떤 구체적인 과세 방식을 택하느냐가 모든 사회에서 정치적 갈등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 ‘증세’, 즉 복지 확대를 위한 비용을 누가, 얼마나 부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이상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됐다. 하지만 이 ‘가장 중요한 정치문제’에 대해 우리 정치권은 진지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정부·여당의 ‘증세 없는 복지’ 구호는 조롱거리로 전락할 조짐이 보인다. 그 수단이라던 지하경제 양성화, 세출 구조조정, 비과세·감면 축소의 3종 세트는 올해 세법 개정안과 내년도 예산안을 통해 정부가 사실상 스스로 파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복지공약을 대폭 축소했음에도 내년 재정적자는 33조원에 이른다. 결정타는 담뱃값, 주민세 인상을 이틀 연속 발표한 정부의 ‘과감한’ 행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부에 따르면 이건 절대 증세가 아니다. 그냥 담뱃값 인상이고 주민세 인상이다. 앞으로도 증세는 없단다.
“여당에게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도깨비방망이가 있다면 야당에게는 ‘부자감세 철회’라는 도깨비방망이가 있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의 말이다. 이명박 정부 때 대규모 부자감세가 이루어졌으니 이를 철회하면 복지 재원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당시 소득세율은 과표 1200만원, 4600만원, 8800만원 이하는 모두 2%포인트씩 인하됐지만, 최고세율 구간(8800만원 초과)은 반대 여론 탓에 35%가 유지됐다. 2012년에는 오히려 38% 최고세율 구간이 신설됐고, 금융소득과세 기준도 강화됐다. 고소득층, 중산층, 서민이 모두 감세 혜택을 봤고, 임기 말에는 약간이나마 부자증세도 이뤄졌다는 말이다. 법인세율은 중소기업을 포함해 모든 기업이 3%포인트 인하됐다. 야당은 이런 조처들 중에 정확하게 어디까지 되돌리자는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부자감세 철회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부자증세’도 간단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국민들이 내는 소득세(국내총생산 대비 4.0%)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8.5%)의 절반 정도다. 부자들이 세금을 안 내기 때문일까? 맞다. 우리나라 부자들, 복지 선진국에 비해 세금을 적게 낸다. 하지만 중산층과 서민도 적게 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평균임금(월 300만원 정도)을 받고 자녀가 두 명인 노동자는 월급의 2.4%를 소득세로 낸다. 같은 조건의 다른 오이시디 국가 노동자들은 10.2%를 낸다. 우리나라 근로소득세의 33%를 소득 상위 1%가, 60.2%를 상위 5%가 내고 있다. 야당이 부자들의 조세저항을 이겨낼 정치력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복지 선진국 가운데 과연 ‘부자’한테만 세금을 많이 거둬 복지재원을 모두 마련할 수 있었던 나라가 있는지 궁금하다.
정치인에게 증세는 독배라는 말이 있다. 자칫 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당, 야당 모두 각자의 도깨비방망이 뒤에 숨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안에 증세를 단행하긴 힘들 수 있다. “국민대타협위원회를 만들어 모든 것을 투명하게 국민께 알리고 조세와 복지 수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찾겠다”고 한 발언만 지켜도 평가받을 만하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증세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안선희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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