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웹사이트에 개설한 블로그 갈무리 사진.
미 무역적자 확대 문제
버냉키, 아시아 신흥국 ‘흑자’ 지목
재무부, 한국 등 ‘환율개입’ 비판
문제 핵심은 달러화 강세
버는 것 이상으로 쓰는
달러화 특권 내려놓아야
버냉키, 아시아 신흥국 ‘흑자’ 지목
재무부, 한국 등 ‘환율개입’ 비판
문제 핵심은 달러화 강세
버는 것 이상으로 쓰는
달러화 특권 내려놓아야
미국의 금리는 왜 ‘제로’밖에 되지 않는가? 그보다 높은 금리로는 성장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저성장에 빠졌는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는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시 한번 ‘남의 탓’을 했다. 중국,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이 버는 것에 비해 너무 적게 돈을 쓰고 있으며, 이렇게 쌓은 저축을 미국에 끌고 들어와 생긴 일이라고 했다. 이들이 미국에 대규모 자금을 유입시켜 달러가 너무 강해졌고, 미국은 만성적인 수출부진과 무역적자, 저성장과 저금리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문제국가’들 중에는 우리나라도 포함된다.
지난 3월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6년 반 만에 최대치인 514억달러로 불어났다. 한달 동안의 적자 확대 속도는 18년여 만에 가장 빨랐다. 그나마 미국의 원유수입 단가가 대폭 떨어진 덕에 그 정도로 막았다. 가격변동에 따른 왜곡을 제거한 미국의 ‘실질’ 무역수지 적자는 이미 2000년대 중반의 역사상 가장 심각했던 수준에 근접해 있다. 미국의 원유 자급도가 대폭 높아지지 않았다면 적자는 이미 사상 최대치로 불어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기록적인 무역적자 확대는 일차적으로 달러화 강세에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 지난 3월까지 1년 사이에 미국 달러화 가치는 25%나 폭등했다. 전례가 극히 드문 통화가치 절상으로 인해 미국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과 용역(국내총생산·GDP)은 잘 팔리지 않게 됐다. 그 결과 지난 1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1년 만에 다시 ‘마이너스’로 떨어졌을 걸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무역적자는 이미 만성적인 현상이다. 2000년대 초중반 달러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던 와중에도 미국의 무역적자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불어났다. 금융위기 직후 내수가 냉각되면서 적자가 대폭 감소하기도 했지만, 이후 경기가 살아나면서 다시 빠르게 확대됐다. 지난 3월의 기록적인 적자는 단지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 문제의 근원이 ‘흑자국’에 있다고 본 버냉키 전 의장은 해법도 그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선 아시아 신흥국들을 겨냥했다. 이 나라들은 1990년대 말 위기를 겪은 뒤로 외환을 축적하는 데 열을 올려왔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정책을 되돌려야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출 부양을 위한 외환시장 개입을 막고, 자본시장을 개방토록 해 그곳의 통화가치를 절상시켜야 한다는 게 버냉키의 해법이다. 같은 맥락으로 버냉키 전 의장은 독일의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에 대해서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미국 재무부는 얼마 전 상반기 환율정책 보고서에서 독일과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를 특히 문제삼으며 공세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버냉키의 해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 3699억달러는 버냉키가 인정했듯이 위기를 다시 겪지 않으려고 축적한 보험이다. 경상흑자와 외환보유액이 많지 않은 나라가 국제 금융시장 혼란기에 어떤 고통을 겪는지를 우리는 2년 전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소동 때 분명히 목격했다. 썰물처럼 탈출하는 외화를 붙잡기 위해 다수의 신흥국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금리를 대폭 올려야 했다. 2008년 유가 폭등기에 우리는 당시 2600억달러에 달하던 외환보유액조차 부족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경험했다.
우리로서도 이 많은 보험이 여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 돈은 모두 빚을 내서 쌓은 것이기 때문이다.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인 우리 당국은 이 과정에서 풀린 원화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해 다시 거둬들인다. 당국이 부담해야 할 이 채권의 이자율은 외환보유액 운용으로 얻는 수익률보다 높기 때문에 손실이 발생한다. 일종의 보험료다.
따라서 버냉키의 해법은 우리도 바라는 바다. 예를 들어 미국 중앙은행이 우리에게 언제든 달러 유동성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많은 외환을 손해를 봐가며 쌓아갈 필요가 없어진다. 경상흑자를 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해야 할 명분과 유인도 크게 약해질 것이다. 버냉키 해법의 열쇠는 미국 스스로가 쥐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금융위기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우리에게 한시적으로 300억달러의 통화스와프를 제공한 적이 있다. 유로존, 영국, 일본, 캐나다, 스위스 등에는 사실상 영구적인 유동성 공급 라인을 열어둔 상태다.
문제는 미국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와 같은 나라들로부터 더는 헐값에 돈을 빌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만약 그 막대한 외환 유동성이 불필요해진다면, 우리는 그 돈을 좀더 수익이 높은 곳에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우리에게 원화가치의 평가절상과 경상흑자의 축소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들의 달러화 특권부터 내놓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수출 보호를 위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평가절하 정책은 일본과 유럽이 더 강도 높게 행하고 있다. 우리와는 단지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들은 미국의 달러 유동성 방화벽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자신도 2010년에는 노골적으로 달러가치 절하 정책을 몰아붙인 바 있다. 이른바 제2차 양적완화다.
미국이 대규모 경상적자를 내는 것은 버는 것 이상으로 소비하는 데 원인이 있다. 1965년 이후로 미국 연방정부 재정은 다섯 해를 빼고는 내리 적자였다. 금융위기 직후에는 적자가 국내총생산의 10%에 이르렀다. 미국 연방정부가 진 빚의 절반은 우리 같은 외국인에게 국채를 팔아 빌린 돈이다. 오로지 달러화 특권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버냉키가 원하는 식으로 미국 경제의 문제를 풀려면 미국 국민들은 복지를 대폭 줄이고 지금보다 훨씬 높은 이자율과 수입물가를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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