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아버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맡던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에 선임됐다. 이건희 회장이 맡고 있던 3개 직위 가운데 삼성전자 회장직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물려받은 것이다. 재계에서는 ‘실질적인 경영권 승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조처’라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15일 오전 임시 이사회를 열어 5월30일로 임기가 끝나는 이건희 이사장의 뒤를 이어 이 부회장을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삼성문화재단도 이날 오전 임시 이사회를 열어 이 부회장을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삼성문화재단 이건희 이사장의 임기 만료일은 애초 내년 8월27일이었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1982년 사회복지법인 동방사회복지재단으로 설립돼 1991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삼성서울병원 운영과 함께 저소득층 가정 보육사업 등을 맡고 있다. 삼성문화재단은 1965년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선대회장이 세워 삼성미술관 리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 미래전략실 임원은 “이건희 회장이 병상에 있어 재단 이사장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어려운 만큼 설립 취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이재용 부회장이 이사장직을 수행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이사들의 의견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공익재단의 이사장 자리는 삼성가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 이병철 회장을 이어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직후인 1988년과 1992년 두 재단 이사장직에 올랐다. 이후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비자금을 건넨 혐의로 수사를 받을 때와 2008년 삼성 특검으로 대국민 사과를 한 뒤 3~4년간을 제외하고는 직접 이사장직을 맡았다. 그런 자리에 실질적으로 그룹 경영을 이끌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이 앉게 된 것은 사실상 그룹 경영권 승계를 공식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있음에도 계열사의 등기임원을 하나도 맡지 않는 등 경영에 대한 법적 책임에서는 여전히 벗어나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날 논평을 내어 “삼성그룹 상장회사의 등기이사직을 맡지 않은 상태에서 두 공익재단의 이사직을 맡게 된 것은 경영능력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회피하면서 후계자라는 타이틀만을 물려받으려는 꼼수라 할 수 있다”며 “공익법인의 이사직을 맡는 게 아니라 권한에 상응해 책임을 지는 방법을 먼저 고민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는 두 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아 이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도 훨씬 커졌다. 삼성문화재단과 삼성생명공익재단은 삼성생명 지분을 각각 4.7%, 2.2% 보유하는 등 여러 계열사의 지분도 갖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의 3세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공익재단을 이용한 상속세 절세에 대한 우려가 있어왔다”며 “공익재단을 절세 수단으로 악용하는 시도를 한다면 뼈아픈 자충수가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과거 삼성문화재단은 이병철 회장에서 이건희 회장으로 경영권이 승계되는 과정에서 계열사 주식을 늘렸다 줄이는 방식으로 상속세 회피에 활용된 적이 있다.
삼성 쪽은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삼성 미래전략실의 한 임원은 “이건희 회장과 제일모직이 삼성생명 지분 40%를 보유한 상황에서 경영권 확보나 행사를 위해 재단 지분 6.9%를 활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향후 재단이 계열사 주식을 추가로 취득하거나 상속세를 줄이려고 이건희 회장 주식을 재단에 추가 출연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또 “상속세는 법이 정하는 대로 투명하고 당당하게 납부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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