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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인플레이션, 잃어버린 독배 또는 성배를 찾아서

등록 2015-06-07 19:50수정 2015-06-07 20:26

안근모의 글로벌 모니터
“아빠, 이건 인플레이션이에요!” 2008년 초의 일이다.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온 딸아이의 기분이 상해 있다. 천원 하던 학교 앞 떡볶이 값이 이천원으로 두 배나 올랐단다. 국제 원자재값이 솟구치고 우리 환율도 대폭 뛴 탓에 물가가 이중의 압력을 받던 시기였다.

그런데 당시의 물가 앙등은 교과서적인 인플레이션은 아니었다. 인플레이션이란 물가가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인데, 당시의 물가 오름세는 1년도 안 돼 자취를 감췄다. 물가 앙등 뒤에 찾아온 것은 오히려 디플레이션 공포였다. 급격한 물가 오름세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전조였다. 그 전에는 세계적으로 집값이 앙등하는 현상이 있었다. 당시의 집값이야말로 교과서가 규정한 인플레이션의 전형이었다.

미국에서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금리정책을 결정한다. 지난 4월말의 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기름값이 싸져서 소비가 불붙을 걸로 기대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서다. “부양정책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한 참석자는 “물가상승률 목표를 높이는 걸 검토해 보자”고 주장했다. 위원회가 정한 목표는 2%다. 이걸 3%나 5%로 올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이다. 서너명의 참석자가 “유용한 논의가 될 듯하다”고 동조했다.

세계 각국 낮은 물가상승률 고민…땅값 인플레이션이 그 뿌리

금융위기가 터진 지 7년이 되도록 중앙은행들은 기존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전세계가 짊어진 공통된 문제는 ‘너무 많은 빚’인데, 물가가 너무 느리게 오르거나 심지어 떨어진다면, 부채 원금의 실질적인 상환부담이 커진다. 예를 들어 쌀 100가마를 살 만한 돈을 빌렸는데 매년 쌀값이 3%씩 오르면, 10년 뒤 원금은 쌀 74가마 값어치로 감소한다. 반면 물가가 1%씩만 오르고 만다면, 10년이 지나서도 원금 가치는 10%도 채 줄지 않는다. 물가가 최소한 중앙은행이 약속한 만큼은 오를 걸로 보고 빚을 냈던 사람들에게는 낭패다. 기름값이 떨어져 가욋돈이 생기면 빚부터 갚는 게 상책이다.

금융위기 초기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파격적으로 내리고 천문학적인 돈을 풀던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을 걱정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발생하지 않았다. 제로금리가 7년째인데도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0% 부근이다. 식품과 기름값을 빼고도 1.2%밖에 되지 않는다. 인플레이션이란 어쩌면 돈키호테의 풍차 같은 건지도 모른다.

물가상승률 목표를 높이자는 주장은 금융위기 직후부터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올 것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면 돈 씀씀이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은행도 금리를 더 내리고 돈을 더 많이 풀어야 한다.

중앙은행들이 특정 숫자로 된 물가상승률을 목표로 삼은 건 역사가 길지 않다. 25년 전 뉴질랜드가 시작했고, 우리는 외환위기 때, 미국은 금융위기가 터진 뒤에야 도입했다. 그 25년 동안 주요 나라에서 교과서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중앙은행들은 자신들의 엄격한 통화정책이 경제주체들의 신뢰를 얻은 결과라고 자랑했지만, 실상은 사람들에게 ‘쓸 돈’(소득)이 없기 때문이란 걸 그들도 이제 깨달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인플레이션 회복을 통해 풀려고 애쓰고 있다.

책상머리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관리직보다는 영업사원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직장생활을 해보고 나서야 하게 됐다. 낯선 사람을 찾아가 뭔가를 판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거니와, 무엇보다 그들은 매년 달성해야 할 ‘목표’에 시달린다. 올해 못 채우면 내년엔 꼭 해내야 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는 연준 이사 시절이던 2003년 일본에 가서 ‘물가지수’ 목표제를 도입하라고 훈수한 적이 있다. 지금의 ‘물가상승률’ 목표제와는 달리, 달성하지 못한 목표가 계속 따라다닌다. 올해 물가지수 102를 목표로 삼았는데 실제 물가가 101로까지밖에 오르지 않았다면, 못 채운 1포인트를 내년 목표에 보태 104포인트를 이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업사원들처럼 더 열심히 뛰어야(돈을 더 열심히 풀어야) 한다.

이런 새로운 목표제를 미국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난해 연준 내부에서 제기됐다. 존 윌리엄스 샌프란시스코 연준 총재다. 사라진 ‘인플레이션’을 찾기 위한 고투는 진행형이다.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상승률 역시 0%대로 떨어져 있고, 생산자물가지수는 3년 넘게 하락하고 있으며, 수출물가지수는 1980년대 후반과 비슷한 수준으로 곤두박질쳐 있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그런데 사실 인플레이션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땅값 인플레이션, 그에 따른 지대 인플레이션이다. 거대한 가계부채는 높은 땅 사용료를 뜻한다. 실물경제 디플레이션(저금리)은 땅값 인플레이션의 원천이며, 땅값 인플레이션(고비용)은 실물 디플레이션의 뿌리다. 영업사원의 고충을 자임할 정도의 책임감이라면, 좀더 넓은 차원에서 통화정책 체제 개혁을 꾀하는 게 나을 거라고 본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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