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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독일 대 그리스 대 IMF…공동체 연대의 한계

등록 2015-07-19 19:25

안근모의 글로벌 모니터
그리스 빚 깎아주라는 IMF
대대적 채무경감 꺼리는 독일
2012년 7월26일, 올림픽 개막을 이틀 앞둔 영국 런던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날만큼은, 역사의 주인공은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였다. 런던 연설에서 드라기 총재는 “유로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다음 순번으로 위기에 몰렸던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다.

유럽 통화공동체 ‘유로시스템’은 회원국들의 ‘무한 손실분담’을 전제로 한다. 적자와 빚이 많은 나라가 금융시장의 신뢰를 잃었을 때, 다른 회원국들이 무한정 돈을 대주어야 한다. 만약 한 회원국이 부도를 내 떨어져 나간다면, 금융시장은 그다음으로 부실한 나라들을 차례로 공격할 것이다. 공동체는 무너진다. 드라기 총재의 선언은 그 ‘무한 책임’을 중앙은행이 지겠다고 천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탈퇴가 불가능한’ 회원국 자격은 그 자체로 도덕적 해이 문제를 잉태한다. ‘이웃들이 우리를 무한정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낳기 때문이다.

1978년 11월30일, 서독 프랑크푸르트의 중앙은행 본부에 군용 헬리콥터가 내렸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고집불통의 분데스방크와 담판을 하러 왔다. 독립성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독일 중앙은행 회의에 국가원수가 참석한 극히 이례적인 사례였다.

당시 유럽은 각국의 환율을 좁은 변동범위로 고정시키는 제도(ERM)를 추진하고 있었다. 환율 불확실성이 사라지면 역내 무역이 촉진되고, 서로 전쟁을 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보았다. 고정환율을 유지하려면 서독처럼 화폐가치(물가)가 안정된 나라의 역할이 긴요했다. 수시로 마르크화를 팔아 인플레이션 국가의 통화를 사들이는 ‘개입 의무’가 거론됐다.

서독 중앙은행이 펄쩍 뛰었다. 새 돈을 무한정 찍어 빌려주었다가는 인플레이션에 함께 말려들 것이 자명했다. 오트마어 에밍거 총재가 슈미트 총리에게 편지를 썼다. 일시적으로라도 시장 개입에서 손을 뗄 수 있도록 근거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 서한을 들고 찾아온 슈미트 총리는 “사실상 동의한다”고 말했다. 대신 문서로 약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슈미트 총리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신문이 독일 속임수에 넘어갔다며 자기 정부들을 공격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체제 역시 겉으로는 ‘탈퇴 불가’의 무한지원 형식을 띠고 있어야 했다.

이 약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1992년이 돼서야 드러났다. 독일은 고금리로 허리띠를 계속 졸라맸지만, 영국과 이탈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조지 소로스가 두 나라를 공격했다. 수백억 마르크를 쏟아부으며 방어해주던 독일 중앙은행이 돌연 손을 떼고 물러났다. 이탈리아와 영국은 결국 고정환율체제를 탈퇴했다. 대대적인 평가절하가 뒤따랐다. ‘그렉시트’의 원조 사례다.

7월12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유로존 19개국 정상들이 모였다. 그리스 구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깜짝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일시적으로 내보내는 ‘타임아웃’을 제안했다. “무엇이든 하겠다”던 약속에는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정작 ‘그렉시트’를 위협할 것 같았던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백기투항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국민들에게 “옳다고 믿지 않는 서류에 서명을 했다. 대신 유로존 탈퇴는 면했다. 보유 외환이 없는 우리는 독자 화폐로 갈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나가면, 그렇게 피하려 했던 임금과 연금의 삭감이 자동적으로 집행되고 만다. 화폐가치가 대폭 평가절하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타임아웃’ 카드는 37년 전 서독의 ‘일시적 개입 유보’ 원칙과 똑같은 것이었다. 실제 행한 사례가 있었기에 위협은 현실적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폭발성 강한 보고서를 잇따라 냈다. 유럽이 획기적으로 깎아주지 않으면, 그리스는 지금의 빚을 갚아낼 수 없다는 게 골자다. 그리스에 가장 적극적으로 긴축을 요구했던 국제통화기금이 어느새 그리스의 최대 희망 사안을 대변하고 있다. 독일은 국제통화기금의 동참을 그리스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고집하면서도 “대대적 채무경감”은 꺼리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부채가 지속 불가능한 채로 방치된다면, 국제통화기금은 구제금융 동참을 거부할 수도 있다. 국제통화기금은 ‘갚아낼 수 있는 나라에만’ 돈을 빌려주도록 돼 있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누구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강요받을 수는 없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했을 법한 말이지만, 사실은 1978년 당시 독일 슈미트 총리가 중앙은행에 가서 소개했던 유서 깊은 격언이다. 그리스에 지원되는 국제통화기금 자금은 우리를 비롯한 전세계 회원국 국민들의 혈세로 모은 돈이다. 유럽 부자 나라들의 동맹을 위해, 독일을 대신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연대를 보내주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와 국제통화기금 역시 독일처럼 “능력을 넘어서는 일”에서 손을 뗄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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