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센터.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재계 6위인 포스코가 일본 철강업체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에 ‘방향성 전기강판’ 제조 기술 관련 영업비밀 및 특허 침해에 대한 합의금 명목으로 3000억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 전기강판을 수출할 때 기술사용료(로열티)를 내고 지역별 수출 물량도 협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대신 신일철은 한국·일본·미국에 각각 제기한 관련 소송 일체를 취하하기로 했다. 국내외 철강시장 부진, 과거 경영부실에 대한 구조조정 지연, 검찰 수사로 인해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포스코의 어려움이 더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13일 포스코 내부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포스코는 곧 신일철과 이런 합의 내용에 최종 서명하고, 추석 연휴 전후로 관련사항을 공시할 예정이다. 포스코의 합의금 규모는 지난 5월 코오롱이 합성섬유 아라미드의 영업비밀 침해로 미국 화학업체 듀폰에 지급한 2억7500만달러(2860억원)보다 많은 것으로, 국내 기업이 외국 기업의 영업비밀 침해와 관련해 지급한 금액으로는 최고 수준이다. 방향성 전기강판은 자동차, 신재생에너지 소재 등에 폭넓게 쓰이며 미래 고부가가치 철강소재로 꼽히는 제품이다.
앞서 신일철은 2012년 4월 포스코가 자사의 퇴직사원을 고문으로 채용해 방향성 전기강판 제조기술을 빼돌렸다며 일본 도쿄지방법원에 영업비밀 및 특허 침해 소송과 함께 약 1조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미국 뉴저지주 연방법원에도 유사한 소송을 제기했다. 포스코는 이에 맞서 2012년 7월 대구지방법원에 채무부존재 소송을 내고 같은 해 9월 미국 특허청과 2013년 4월 한국 특허심판원에 특허무효 심판을 청구해 관련 소송이 진행중이나, 법적 분쟁을 계속하기보다는 협상으로 매듭짓는 게 회사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포스코의 총 부담액은 합의금과 로열티를 포함하면 3000억원을 훌쩍 넘길 전망이어서, 가뜩이나 판매 부진과 부실 심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스코로서는 엎친 데 덮친 꼴이다.
포스코의 합의금 3000억원은 지난해 당기순이익 5566억원(연결기준)의 54%에 이른다. 회사의 한 간부는 “올해 1·2분기의 당기순이익(연결기준)이 각각 3352억, 1173억원을 기록했다. 합의금 지급이 3분기 실적에 반영되면 분기실적이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또 방향성 전기강판의 수출 물량에 대한 로열티 지급과 물량 협의가 의무화할 경우 신일철과 경쟁하는 미국 시장 등에서 수출 경쟁력에 타격이 예상된다. 포스코는 지난해 생산한 방향성 전기강판 물량이 총 25만톤(7500억원어치)이고, 이 중에서 14만톤이 수출분이라고 밝혔다. 포스코의 해외생산판매 부서 간부는 “일본과 경쟁하는 시장에서 성과를 못 내고 중국과 경쟁하는 중저급강 시장에 치중하면 수익성 악화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포스코 내부에서는 경영진의 대응 실패로 손실을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회사 마케팅 쪽 한 임원은 “사건 발생 시점인 정준양 전 회장 시절에 초기 대응이 안이했고, 권오준 현 회장도 지난해 3월 취임 이후 역시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손실을 키웠다”며 “권 회장이 올봄 직접 일본을 방문해 신일철 최고경영진을 만난 뒤 원만한 사건 해결을 자신했었다”고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권오준 회장 체제에 대한 위기론이 본격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권 회장이 전임 정준양 회장의 잘못된 투자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고, 현 위기 극복에 필요한 신속하고 결단력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해 위기가 더 깊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내용의 문건이 최근 포스코 내부에 광범위하게 돌아 분위기가 크게 어수선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포스코 홍보실은 “그동안 꼭 소송으로 해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보고 소송과 협상을 병행해 왔으나,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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