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경기도 이천의 에스케이하이닉스 공장에서 협력업체 직원으로 일하는 오일경(왼쪽부터)씨와 김연진 부주임, 양은순 반장이 원청 대기업인 하이닉스의 노사 합의로 시행된 ‘임금공유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에스케이하이닉스 제공
에스케이(SK)하이닉스 협력업체 노동자의 목걸이 색깔은 제각각이었다. 지난 11일 경기도 이천의 에스케이하이닉스 공장에서 만난 정규직 직원들은 에스케이 로고가 박힌 빨간 줄에 사원증을 매달았지만 협력업체 직원들은 달랐다. 반도체 제조장비 세정을 맡는 에스엠시(SMC)엔지니어링의 오일경(37)씨는 파란색을, 반도체 원료인 웨이퍼를 나르는 토스의 양은순(44) 반장은 초록색을 맸다. 안전을 담당하는 삼구아이엔시(INC) 김연진(27) 부주임의 목걸이는 분홍색이었다. 다양한 색은 신분의 차이를 뜻했고, 그만큼 급여도 격차가 있었다. 이들의 연봉은 2천만~3천만원 중반대로 정규직의 60~70% 수준이다.
하지만 올해 처음으로 이런 격차를 줄이는 일이 생겼다. 하이닉스 노조가 임금 인상분 3.1%의 일부인 0.3%를 협력업체 노동자에게 돌렸고, 하이닉스 사쪽도 같은 금액을 보탰다. 이렇게 마련된 66억원은 10개 협력사 직원 4700명에게 돌아갔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인 협력업체를 제쳐두고 성장의 열매를 독식하다 보니 노동시장 양극화의 골은 깊어가는 상황이다. 이에 하이닉스 노조가 협력업체와 ‘임금공유제’ 실험에 나섰고, 사쪽도 동참한 셈이다.
이는 협력업체 직원들의 넉넉한 씀씀이로 이어졌다. 지난 6월 임금공유제 합의로 120여만원 연봉 인상이 결정되어 7월부터 월급이 10만원가량 올랐다. 8월엔 50여만원의 격려금도 지급됐다. 오일경씨는 격려금을 식구들과 여름휴가를 보내는 데 썼다. 양은순 반장은 새 티브이를 사는 데 썼다. 김연진 부주임은 “가족과 여름휴가 때 돼지고기 대신 쇠고기를 먹었다”고 흡족해했다.
협력업체 일자리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커졌다. 양은순 반장은 “과거엔 이익배분이 없어 저희들(대기업 정규직)끼리만 나눈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젠 내가 더 하면 더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 부주임도 “협력업체 직원도 인정받고 회사와 함께 성장한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변화의 단초가 보이는 일터에서 오래 일하기를 희망했다. 에스엠시엔지니어링 김현주 대표도 “과거엔 채용이 어려웠는데 최근 15명을 뽑으려니 50명이 지원했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번 실험에서 한 축을 담당한 하이닉스 사쪽의 현순엽 기업문화본부장(전무)은 “노조와 잘 합의가 돼 이번에 처음 시도한 것”이라며 “다른 기업도 참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이닉스 사쪽에선 내년에도 임금공유제를 이어갈 의지가 있다. 하이닉스 노조는 일단 내년 임금협상을 통해 결정하되 현행 취지를 살려갈 예정이다. 임금공유제는 상대적으로 힘이 있는 대기업 노조가 임금협상에서 협력업체 노동자를 배려해 이들의 이해를 포괄적으로 반영하는 뜻도 담고 있다.
현재 노동시장 개편과 노사정 합의로 격렬한 후폭풍이 일고 있지만, 이른바 ‘나쁜 일자리’의 질을 높이고 노동시장 양극화 골을 메우려는 ‘임금공유제’ 실험 논의는 아직 미미하다. 전경련 정조원 홍보팀장은 “회사마다 사정이 달라서 경제단체 차원의 임금공유제 논의는 없다”고 말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은 “기아차 노조에 협력업체 직원이 참여해 회사 쪽과 교섭을 하는 등 다양한 연대가 시도되고 있다”면서도 “아직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와 함께 노동시장 개선에 나서는 부분이 활성화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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