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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쉿! 퇴근 포기 ‘헬직장’이 어디냐고? 너무 많아서…

등록 2015-10-25 20:13수정 2015-10-26 09:45

[경제의 창]
“살인적인 업무, 야근의 일상화로 개인 시간이 없음”, “남들 일할 때 일하고 남들 쉴 때도 일해야 한다”, “하루하루 퇴근하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피로감이 몰려옴”, “먼저 퇴근한다고 쌍욕하는 팀장”, “업무량 많고 퇴근시간 늦어 개인 시간을 만들기가 어렵고 갑작스런 지시가 많은 회사”, “군대 문화, 술 문화, 야근 문화”….

25일 <한겨레>가 단독 입수한 ‘국내 10대 그룹 직원들의 자기 회사 평가 자료’ 1만930건에는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익명을 보장하는 소셜미디어 기업평가 기업 ‘잡플래닛’(jobplanet.co.kr)에 접속한 이들이 지난해 4월부터 올해 9월까지 1년 반 동안 남긴 기록이다. 자신이 일하는 회사에 대해 ‘업무와 삶의 균형’, ‘승진 가능성 및 기회’, ‘복지 및 급여’ 등 5개 항목을 성실히 평가해야만 회원 가입이 되는 ‘잡플래닛’에는 현재 30만건의 기업 평가 정보가 쌓여 있고 월평균 방문자는 300만명에 이른다.

익명 보장 기업평가 소셜미디어에
직장인들 자기 회사 솔직한 리뷰
‘잡플래닛’ 1년반 만에 30만건 쌓여

10대 그룹 118개사 평가 집중분석
‘업무와 삶의 균형’ 평점 보니
41개사 5점 만점에 2.5점 밑돌아

‘아이에게 적대적 기업’ 현실 적나라
‘육아는 여성 몫’ 굴레 겹쳐
여성직원 더 허덕…저출산은 필연

“빨리 결혼하면 혜택 준다”
정부 저출산·고령화 대책 헛다리

한국의 직장인이 ‘일과 가정의 양립’을 어느 정도 하며 살고 있는지 국내 10대 그룹 대기업으로 범위를 좁혀 살펴봤다. 삼성·현대자동차·에스케이(SK)·엘지(LG)·롯데·포스코·지에스(GS)·현대중공업·한진·한화 그룹의 계열사 직원들이 ‘업무와 삶의 균형’에 대해 1~5점으로 점수를 매겼다. 그 결과 국내 10대 그룹 계열사 10곳 가운데 3~4곳 직원들의 ‘일과 가정의 양립’ 수준이 보통 수준(2.5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평가 대상이 된 10대 그룹 계열사 118곳 가운데 직원들이 ‘업무와 삶의 균형’ 부문에서 5점 만점에 중간 점수보다 낮은 평균 2.5점 미만을 준 기업은 롯데쇼핑 롯데마트사업본부, 삼성바이오로직스, 롯데로지스틱스, 롯데제과, 롯데하이마트, 현대삼호중공업, 지에스리테일, 삼성에스디아이, 현대오일뱅크, 엘지상사, 삼성전자, 엘지디스플레이, 현대제철, 현대건설 등 41개에 이르렀다.(표 참조) 남녀 직원 모두에게서 4점 이상을 받은 기업은 에스케이이노베이션과 포스코에너지뿐이었다.

‘업무와 삶의 균형’ 부문 하위권 기업 41곳을 그룹별로 보면 롯데그룹이 도드라진다. 롯데그룹은 평가 대상에 속했던 22개 계열사 가운데 절반이 넘는 14곳이 보통 수준(2.5점) 미만의 평가를 받았다. 특히 5점 만점에 2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하위 10개 회사 안에 롯데 계열사만 8개가 포함됐다. 롯데그룹 다음으로 삼성그룹의 16개 계열사 가운데 절반인 8개, 현대자동차그룹 18개 계열사 가운데 7개, 엘지그룹 17개 계열사 가운데 5개가 평균 2.5점 미만의 성적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직원들이 업무와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없다고 평가한 41개 기업의 절반에 가까운 20곳은 여성가족부가 지정한 ‘가족친화 인증기업’이라는 점이었다. 여성가족부가 ‘근로자가 일과 가정생활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인 기업’에 주는 이 인증을 받은 기업·공공기관 수는 2014년 말 기준 956개에 이른다. 정부는 저출산 대책으로 이 인증제도를 더 확대한다는 계획을 지난 19일 밝혔지만, 이런 인증이 과연 기업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커지는 대목이다.

여성 직원이 특히 낮은 점수(2점 이하)를 준 기업은 현대위아, 실리콘웍스, 현대삼호중공업, 하이프라자, 롯데손해보험, 삼성생명보험, 코리아세븐, 삼성바이오로직스, 롯데쇼핑 롯데마트사업본부, 에프알엘코리아, 롯데하이마트, 현대정보기술, 롯데로지스틱스, 롯데제과, 이노션, 지에스왓슨스 16곳이었다. 이밖에도 낮은 점수를 기록한 기업이 있었으나 평가에 참여한 여직원 수가 지나치게 적을 경우 주관적인 판단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어 제외했다.

여성 직원이 ‘승진 기회 및 가능성’에서 5점 만점에 평균 2.5점 미만을 준 기업은 포스코플랜텍, 현대캐피탈, 현대오일뱅크, 실리콘웍스, 현대엠엔소프트, 롯데손해보험, 에스케이해운, 현대카드, 한진, 지에스리테일 10곳이었다. 특히 현대오일뱅크, 에스케이해운, 포스코플랜텍은 평점을 매길 때 남성 직원이 여성 직원보다 1점 이상 높게 주는 등 성별 격차가 컸다.

여성에게 배타적인 기업일수록 직원들이 적은 평가 내용에 ‘군대식, 보수적 문화, 남성 중심적’이라는 표현이 잦았다. “남성적 문화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근무하기가 힘들며 보수적인 기업문화가 심하다”거나 “야근과 주말 출근을 당연시하는 군대식의 경직된 기업문화”, “70년대 군대식 문화와 경직된 의사소통” 등의 쓴소리가 이어졌다. “낮은 유리천장”, “업무 성과가 아닌 유흥으로 평가받는 문화, 여성도 마찬가지” 등 현실적인 한계를 털어놓은 이들도 많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불가능한 기업일수록 “아예 여직원이 적은 회사”, “여성 공채 직원, 여성 정직원을 보기 어려운 회사”라는 평가가 많았다. 남성 직원이 이렇게 평가했어도 사내 소수인 여성 직원의 평가가 거의 없다 보니, 여성 직원이 특히 낮은 점수(2점 이하)를 준 기업 순위에 포함시킬 수 없었던 데도 여럿이다.

이렇게 ‘가정과 개인의 삶을 포기하라는 기업문화’와 ‘여성에 배타적인 분위기’에 발 딛고 선 한국 직장인의 삶은 피폐해지고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다. 출산율은 2014년 기준 가임여성 1명당 1.2명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5 삶의 질’ 보고서를 보면, 한국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6분이다. ‘육아=여성의 몫’이란 공식과 ‘아이에게 적대적인 기업’이 이중의 굴레가 되는 사회다.

독일의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은 2006년에 쓴 <모성애의 발명>에서 정확히 이 두 가지를 저출산의 원인으로 꼽는다. ‘여성은 출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만 직업을 가지라’는 사회적 요구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간 기업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잔혹한 업무 강도’는 가정을 꾸리고 개인의 삶을 누릴 여유를 짓밟는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지난 19일 정부가 내놓은 저출산 대책은 이런 고찰과 거리가 멀다.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시안’ 공청회에서 정부는 저출산이 ‘늦은 결혼’ 때문이라며 어린 부부에게 임대주택 가점을 주고 난임 시술비를 지원한다는 대책을 내놨다. 이에 참여연대는 “전통적 가족 개념에 기반한 시대착오적 구상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성차별에 관한 문제의식은 배제됐다”고 비판했다.

평가를 작성한 한 대기업 직원은 이렇게 적었다. “집에 언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다운 생활을 원한다면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빨리 취직해서 빨리 결혼해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부와, 집에 갈 생각 말고 일하라는 기업 사이에서 직장인들은 ‘인간다운 삶’에 대해 묻고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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