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군 안남면 배바우작은도서관 앞에서 어린이들이 마을순환버스를 타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오랜 염원을 바탕으로 2009년부터 안남면 주민·군청·시민단체가 힘을 모아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제공
지난해 3월 충남의 한 농촌마을 지역도서관 회의실에 주민 수십명이 모였다. 군청 소재지와 여러 읍·면 및 배후 마을을 연결하는 노선버스가 운행노선과 횟수를 대폭 줄이자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승용차 없이 대중교통에 의존해야 하는 농촌마을 사람들, 특히 학생과 노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불편과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그동안 우리가 그 버스를 얼마나 많이 이용했는데 이럴 수 있냐”, “군청이 왜 가만히 있느냐” 등 다소 격앙된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버스회사에 이용객이 갈수록 줄어 수익성이 떨어지는 버스노선 운영을 마냥 요구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군청에 의존해 세금으로 운영하는 것도 걱정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군수의 정책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데다 공무원들이 주민들의 수요를 세밀히 살펴 운영해줄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버스·식당 등 필요한 재화·서비스
수요 있지만 공급 없는 ‘시장 실종’
농촌에 산다는 것 자체로 소외당해
주민들 스스로 필요와 해결책 논의
‘더 많은 소득’ 넘어선 새로운 양상
‘지방 소멸’ 막고 공동체 지속 도모
그때 누군가 불쑥 손을 들어 “‘마을버스 협동조합’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버스도 우리 주민 스스로 직접 운영하면 거기서 일자리도 생기고, 버스가 마을의 자산이 될 수도 있다. 군청의 지원을 받지 말자는 건 아니다. 우리 자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긴 하지만 모든 것을 군에 의존하면 정작 주민들의 필요를 잘 충족하지 못한 채 돈만 돈대로 들고 큰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전국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에 따르면 농어촌 버스는 2003년 2058대에서 2012년 1796대로 줄었다. 농어촌에서 운행하는 버스회사도 경영난에 빠져 같은 기간 동안 106곳에서 88곳으로 감소했다. 2010년 ‘농림어업총조사’에 의하면 전국 농촌마을(행정구역 리) 3만6000개 중 시내버스가 운행되지 않는 지역이 3400곳(9%), 하루 10회 미만 운행지역이 1만6000여곳(43%)에 이른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도 2014년부터 대중교통이 취약한 농촌지역 교통여건 개선을 위해 ‘농촌형 교통모델 발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시·군, 지역아동센터, 마을자치회 등 농촌지역에 교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누구나 이 사업에 신청할 수 있다. 차량 구입비와 운영비 등으로 2년간 5000만원씩 지원한다. 2014년 13곳, 2015년 8곳, 올해 들어 지금까지 11곳이 신규 사업 대상자로 선정됐다. 지자체와 함께 농어촌 버스 문제 해결을 위한 마중물 구실을 하는 사업인 만큼 주민들이 마을버스 협동조합 활동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해볼 수 있다.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이 최근 펴낸 ‘농촌지역의 사회적 경제 실태와 활성화 방안’을 보면, 우리나라 여러 농촌마을은 생활에 필요한 재화 및 서비스 공급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비싼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수요가 있음에도 공급이 일어나지 않는, 농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장 실종’이다. 버스회사로서는 갈수록 인구가 줄어 수요 기반이 취약해지고 있는 농촌지역에 버스를 운행하는 일은 꺼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농촌이 겪고 있는 ‘사회적 배제’라고 할 수 있다. 농촌에 산다는 그 자체로 교통·의료·문화·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소외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마을버스 협동조합은 이러한 사회적 배제에 농촌 주민 스스로 대응해보려는 자조적인 사회적 경제 조직이다. 농촌이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배제를 사회적 경제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농촌마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농협·생협 등 기존의 농촌지역 사회적 경제 단체가 주로 ‘더 많은 소득’ 같은 경제적 목적에서 활동했다면, 마을버스 협동조합 등은 단순한 비즈니스 성격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그 양상이 확연히 다르다. 지역의 필요를 자체적으로 충족하는 여러 활동을 통해 ‘농촌 커뮤니티 지속’을 도모하는 새로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섭 연구위원은 “지속적인 농촌 인구 감소 등으로 시장이나 국가가 해결하지 못하는 농촌지역의 문제나 필요가 생겨나고 있다. 요즘에 마을공동체 스스로 사회적 경제 방식으로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4·13 총선에서 강원도 홍천·철원·화천·양구·인제가 단일 선거 지역구로 묶였다. 농촌 고령화와 인구 감소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농촌지역에 공급되는 공공 서비스와 상업적 생활 서비스도 계속 줄어들고 있는 중이다. 악순환이다. 급기야 농촌지역 소멸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일본의 행정관료 출신 마스다 히로야가 2014년에 펴낸 <지방소멸>에 따르면, 일본 역시 지금의 인구 감소 추세대로라면 향후 25년간 일본 지방자치단체의 절반에 이르는 896개 지자체가 소멸하게 된다. 지난 3월 한국고용정보원이 내놓은 ‘한국의 ‘지방소멸’에 관한 7가지 분석’ 보고서는 마스다 히로야의 방법을 적용할 경우 우리나라 79개 지자체가 ‘소멸 위험지역’에 속한다고 분류했다. 물론 대부분 농촌지역이다. 농촌지역 기초 지자체(160곳) 가운데 절반가량은 앞으로 30년 이내에 사람이 없는 인구소멸도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충남 장곡면의 홍성유기농영농조합에서 운영하는 생미식당. 이 역시 농촌 소멸 위협에 대응해, 지역의 자체적인 필요에 기반해 만들어진 사회적 경제 조직이란 점에서 이목을 끈다. 이 식당이 만들어진 ‘필요’는 농사일을 하다가 들판에서 먹는 음식, 이른바 ‘들밥’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인근에 식당이 없는데다, 도시처럼 배달시키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어느 날, 함께 밥을 먹던 사람들이 모여 이 정도 인원이면 식당을 차릴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한 것이 출발이었다.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마을 식당에서 판매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여기에 홍성유기농영농조합이 적극 나섰고 2013년 식당 개업에 이르렀다. 외부 손님도 받지만, 지역 주민들을 위해 6000원짜리 한식 뷔페 밥상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 농민이 제공하는 채소의 품질이 낮다거나 식당 서비스에 대한 고객 불만족도 간혹 제기됐다. 하지만 “우리 지역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을 우리가 요리해 지역 주민들과 함께 먹자”는 애초의 필요에 더욱 집중했고, 이제 지역의 좋은 소통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김영미 홍성유기농영농조합 기획관리부장은 “이익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다. 지역 사람들을 위해 운영하는 식당이기에 5000원의 가격을 유지하다 지난해 8월에야 1000원 높였다”고 말했다.
농촌지역 사회적 경제의 또다른 대표 사례로 손꼽히는 ‘옥천순환경제공동체’는 주민 스스로 참여해 풀어가는 논의 구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2013년 설립된 옥천순환경제공동체는 주민과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기업, 사회적기업, 농민회, 다문화가족 자조모임, 대안학교 등 다양한 주민조직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지역의 자원을 조사하고 지역의 필요가 무엇인지 발굴하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상시적으로 논의한다. 매달 한 번 열리는 정기운영위원회는 각계각층의 지역 사람들이 모여 지역의 현안과 협업을 모색하는 자리다. 정순영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사무국장은 “사회적기업이든 마을기업이든 정부 지원금이 있다 해서, 사업적인 가능성이 보인다 해서 무조건 만들려 하면 안 된다. 지역에 필요한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촌은 경제적으로 자원이 많지 않다. 그래서 더욱 지역의 자원들이 결합되고, 이 과정에서 끈끈한 민간네트워크가 형성돼야 한다.”(구자인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주수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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