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이 반덤핑·비관세장벽을 앞세워 우리나라 상품에 대한 수입규제에 나서면서 무역분쟁·갈등이 넓고 깊게 번지고 있다. 오랜 자유무역질서가 후퇴하고 바야흐로 각국이 21세기판 ‘근린궁핍화’(타국의 희생 위에 자국 경기 회복을 도모하는 경제정책) 무역 각축에 돌입하고 있는 양상이다. 각국 기업과 통상당국이 합세해 한국 상품을 걸고 넘어지는 일이 빈발하면서 무역에 의존하는 기업마다 수출시장 위축과 무역분쟁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22일 한국무역협회가 집계한 수입규제 동향을 보면, 11월 기준 우리나라 제품에 대한 수입규제는 30개국에 걸쳐 총 182건에 이른다. 한국시장에 견줘 싼 가격으로 팔고 있다며 제소하는 반덤핑(관세부과)이 132건, 수입물량이 급증할 때 발동하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가 43건이다. 국가별로 인도(33건)·미국(23건)·중국(13건)이 많다.
문제는 반덤핑·세이프가드가 2012년부터 갑자기 증가 일로에 있다는 점이다. 한국 상품 수입규제는 2012년 18건, 2013년 20건, 2014년 24건, 2015년 27건, 2016년(11월말 기준) 38건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주요 수입규제 타깃 품목은 공급과잉으로 몸살을 앓는 철강·석유화학이다. 미국으로의 철강 수출액 중 85%(27억달러)가 수입규제(조사) 대상이고, 미국 화학업체들이 제소한 한국산 가소제(DOTP)에 대한 반덤핑 조사가 진행중이다.
아시아에서도 11개국이 92건의 수입규제 조처를 발동하는 등 우리 제품들이 통상분쟁에 휩쓸리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최근의 반덤핑 수입규제는 자국 산업의 부침과 관련돼 있다. 미국·유럽연합뿐 아니라 중국·인도·동남아 각국도 자국 산업을 키우고 보호하기 위해 철강제품을 중심으로 수입규제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덤핑·세이프가드뿐만이 아니다. 기술장벽(기술규정·표준·인증)·통관지연·위생규범 등 유형이 워낙 광범위해 일일이 집계하기도 어려운 비관세장벽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산업부가 이달부터 ‘비관세장벽 통합 데이터베이스’를 가동하며 서둘러 대응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상품에 대한 해외 비관세장벽 사례는 파악된 것만 900건(12개국·총 20개 품목)에 이른다. 엘지(LG)경제연구원은 지난달 ‘반세계화 시대의 세계화’ 보고서에서 “자유무역을 확대한다는 세계무역기구(WTO)가 본래의 설립 의도를 잃어간 지 이미 오래다. 세계화를 이끌어온 나라들의 반덤핑 무역규제 조처가 지난 수년간 더욱 빈번해졌다”며 ‘세계화 위축’을 진단했다. 자유무역이라는 국제 공조가 깨지고 기존 무역질서와는 판이하게 다른, 낯설고 새로운 환경으로 돌입하고 있다는 얘기다.
왜 지금 반덤핑·비관세장벽이 무역 보호 수단으로 한층 강화되고 있는 걸까? 그 까닭으로 짚을 수 있는 한 가지는 환율전쟁의 약화다. 금융위기 이후 각국은 통화완화 정책으로 자국 통화가치를 경쟁적으로 절하해 자국 상품의 수출 가격경쟁력을 도왔다. 그러나 이제 주요국의 양적완화는 ‘더 확대하지 않는’ 수준으로 진정세에 접어들었다. 통화를 앞세운 무역전쟁은 잦아들게 된 셈이다. 대신 각국마다 팽창적 재정정책으로 선회를 꾀하고 있다. 재정정책으로 국내 민간수요가 활력을 되찾을 시기가 오자 자국 상품을 보호하며 경기 회복세에 먼저 올라타겠다는 것이다. 장기 경기침체에 빠져있던 각국마다 미약하게 움트는 회복세라도 붙잡고 앞다퉈 ‘나부터 살고보자’는 근린궁핍화 보호무역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근린궁핍화는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 세계적으로 횡행했다.
또다른 사정은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발효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무역협정으로 전통적인 관세는 자국산업 보호 수단으로서 효과가 크게 퇴색했다. 이를 입증하듯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국가일수록 관세가 아닌 반덤핑·세이프가드 수입규제가 많은 게 수치로 확인된다. 유럽연합(2011년 발효)은 한국 제품에 대해 △대형 티브이 소비전력 기준 강화 △어묵의 성분 비율(명태 함량) 지적 △삼계탕 수입위생검사 지연 등 각종 비관세장벽을 활용해 자국 상품을 보호하고 있다. 인도(2010년 협정발효) 역시 2013년 이후 우리 상품에 대한 집중 공세에 들어가 총 33건(올해 9건)의 수입규제를 발동했다. 아세안(2007년 발효) 회원국인 인도네시아(9건)·말레이시아(7건)·타이(11건)·베트남(5건)도 한국 상품에 대해 반덤핑 및 상계관세(국내 보조금에 대한 제소) 조처를 시행하고 있다.
반면 우리와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있지 않은 일본의 수입규제는 2000년대 들어 단 1건(2015년)뿐이다. 주형환 산업부 장관은 지난 9월 중국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스탠드 스틸(Stand Still·자유무역협정 체결 당시보다 강화된 규제 금지)과 ‘롤백(Roll Back·협정 체결 당시 수준으로 회귀)’을 도입하자고 요구한 바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