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총수의 전횡 견제”인가, 아니면 “외국자본의 경영권 장악 우려”인가.
2월 임시국회에서 경제개혁 입법 처리를 앞두고 상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론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
개혁 성향의 대선후보, 시민단체, 전문가들은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할 최우선 경제개혁 과제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을 꼽는다. 핵심은 감사위원 분리선출, 집중투표제 의무화, 이중대표소송 도입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거수기로 전락한 이사회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사외이사를 겸하는 감사위원을 뽑을 때는 모든 주주들의 의결권을 3%(동일인 기준)로 제한하는 내용이다. 집중투표제는 이사를 뽑을 때 ‘1주 1표’ 원칙을 적용하는 대신 1주에 대해 선임하는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표)을 줘서 소액주주들이 표를 몰아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한다. 이중대표소송은 자회사의 이사가 불법행위로 회사에 손실을 끼친 경우 모회사의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제도로, 재벌 총수가 비상장 자회사를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막는 장치다.
법 개정의 필요성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정경유착 사태에서도 확인된다. 53개 대기업이 미르·케이스포츠 재단에 774억원을 출연했는데 이사회 의결을 제대로 거친 기업은 단 2개뿐이고, 그나마 형식에 그쳤다. 사외이사제가 경영에 대한 감시·견제 기능을 전혀 못 하고 거수기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개혁 성향 시민·전문단체로 구성된 경제민주화네트워크는 1일 더불어민주당과 ‘경제민주화 및 민생살리기 입법 간담회’를 열고 2월 국회에서 상법 개정을 최우선으로 처리할 것을 요구할 계획이다. 정치권에서도 법 개정에 대한 공감대가 크다. 20대 국회에 제출된 기업지배구조 개선 관련 상법 개정안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 등이 발의한 것을 포함해 무려 11개에 달한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도 재벌개혁안에 상법 개정을 포함시켰다. 지난 25일 더불어민주당·새누리당·국민의당·바른정당 등 여야 4당이 2월 임시국회 개혁 입법 처리 방안을 논의했을 때 상법 개정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견 접근이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참여연대의 안진걸 공동사무처장은 31일 “상법 개정안은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공약으로 약속했던 것으로, 촛불시민혁명의 의미를 살리려면 2월 국회에서 꼭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보수진영은 법 개정이 이뤄지면 대기업의 경영권 방어가 취약해지면서 자칫 외국 투기자본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반발한다. 전삼현 숭실대 교수·최준선 성균관대 교수는 “국내 대기업들이 외국 투기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노출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보수언론들도 “단기 차익을 노리는 외국의 투기자본이 3% 이하로 지분을 쪼개는 방식으로 이사회에 진출하고, 집중투표제까지 도입되면 경영권까지 쥘 수 있다”며 마치 대기업 경영권이 외국자본에 넘어갈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대다수 전문가들은 보수진영의 이런 주장이 왜곡과 과장이라고 반박한다. 2015년 삼성물산 합병에 반대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 같은 외국자본의 관심은 기업 경영권을 뺏는 게 아니라, 배당 확대와 주가 상승을 통한 이익 극대화라는 것이다. 또 외국자본의 지분 쪼개기나 공동행동을 통한 경영권 위협도 차단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3% 의결권 제한을 대주주를 포함해 모든 주주들에 똑같이 적용하면 외국자본의 지분 쪼개기 수법은 불가능해진다”면서 “외국자본들이 공동으로 경영권을 위협할 위험성도 영국처럼 일회성으로 공동행동을 할 때는 허용하되, 지속적인 공동행동은 ‘공동보유자’로 보고 엄격히 규제하면 해결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을 막으려는 보수진영의 시도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한다. 김 소장은 “2015년 엘리엇이 삼성물산의 불공정 합병을 반대하자 삼성과 보수언론이 ‘외국 투기자본이 삼성을 위협한다’는 왜곡된 애국심 마케팅을 동원해 무리하게 합병을 추진한 것이 결국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의 위기를 자초했다”고 꼬집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대기업들이 상법 개정에 끝내 반대하면 국민연금이 대기업 보유 지분을 늘리고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통해 무능하거나 불법행위를 한 총수 일가를 경영에서 퇴출시키는 대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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