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18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화상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는 모습.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이 벌어지는 지난 4년간 한국의 공직사회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곽정수 산업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나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를 변호하는 것도 나의 임무와 부합하지 않는다.”
샐리 예이츠 미국 법무장관 대행이 직원들에게 보낸 메시지의 일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슬람 7개국 출신의 입국을 막는)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예이츠를 즉각 해임했다. 하지만 시애틀 연방지법은 행정명령에 대한 집행금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여 예이츠의 손을 들어줬다.
이를 지켜보며 우리에게는 왜 샐리 예이츠 같은 관료가 없을까 하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나 혼자뿐일까?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이 벌어지는 지난 4년간 한국의 공직사회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적지 않은 고위 관료들이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했다. 구속기소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대표 사례다. 최순실이 회장 행세를 한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대기업 50여곳에 774억원을 출연하도록 강요했다. 또 현대자동차·롯데·포스코·케이티를 상대로 최순실 지인이나 측근이 운용하는 회사와 거래, 체육시설 건립비 출연, 스포츠팀 창단, 낙하산 인사 강요 등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이들 고위 관료들 밑에서 불법 행위의 심부름을 한 공무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공무원 행동강령은 ‘상급자가 공정한 직무수행을 현저하게 해치는 부당한 지시를 하는 경우 따르지 않을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논란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샐리 예이츠는 정의가 아니라며 거부했다. 반면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은 명백한 불법인데도, 한국의 공직사회는 군말 없이 수발을 들었다. 장차관이나 청와대 수석은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한배를 탄 사람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반 공무원들은 정권에 상관없이 20~30년간 공직사회에서 뼈를 묻을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정의가 아니다”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면 역사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공직자들이 끝내 침묵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당사자들은 그 해답을 청와대의 인사권 장악에서 찾는다. 박근혜 정부는 장차관은 물론 국·과장 인사까지 좌우했다. 경제부처의 한 간부는 “국·과장의 승진뿐만 아니라 이동까지 인사검증이라는 명분으로 간섭하며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했다”며 “이렇다 보니 부당한 지시가 있어도 누가 소신껏 거부할 수 있었겠느냐”고 털어놨다. 공무원들은 박근혜 정부의 행태로 볼 때 문화계뿐만 아니라 공직사회에도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 박 대통령은 최순실의 딸과 관련된 문체부 조사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며, 담당 국·과장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쫓아냈다. “공무원은 형의 선고, 징계처분 등에 의하지 않고는 그 의사에 반하여 휴직·강임·면직을 당하지 않는다”고 정한 국가공무원법(68조)은 철저히 무시됐다.
국민 다수가 국정농단 사태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 적폐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2월 임시국회에서 재벌·검찰개혁 등이 최우선 과제로 꼽히는 이유다. 그러나 공직사회 개혁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공직자들이 국민보다 권력의 눈치를 보고, 상부의 부당한 지시에 무조건 따르는 나라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새 정부는 공직사회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 공무원들을 무조건 혼내는 게 능사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자부심을 갖고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최근 관가에선 고위직 승진 후보들의 속앓이 소문이 무성하다. 정권 말에 승진했다가 조기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불과 서너달 만에 옷을 벗어야 하는 불상사를 걱정한다는 것이다. 새 정부의 공직개혁은 공무원 신분 보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특히 법에서 임기를 정한 경우 자진해서 물러나지 않는 한 임기를 100% 보장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샐리 예이츠를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