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conomy | 현장에서
서울 중구 다동에 있는 대우조선해양 서울사무소 사옥 1층 바깥에는 빨강·주황·노랑색 등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송이버섯 조형물 10여개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원색이 인상적인, 아담한 버섯 조형물 정원이다. 흔히 ‘요정의 화신’으로 불리는 이 버섯들 한 가운데 동화 속 백설공주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서 있고, 그 주변에 일곱 난쟁이들이 모여 망치와 선박 설계도면을 들고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거제 옥포조선소’ 풍경이다. 동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이야기를 다이아몬드 광산 대신에 배 짓는 상황으로 살짝 바꾼 것이다.
이 조형물을 유리창 바깥 배경으로 17~18일 대우조선 발행 무보증 회사채(총 1조3500억원)의 사채권자 집회에 참가하는 채권자 20~30여명이 1층 로비에 속속 모여들었다. 우정사업본부·사학연금·수협·농협·신협·교보생명 관계자들이 집회가 열리는 17층 대강당으로 저마다 올라갔다. 집회는 비공개였다. 집회마다, 시작된 지 한 시간가량 지났을까? 대우조선 관계자가 그때마다 메모지 한장을 들고 1층으로 내려와 기자들 앞에서 읽었다. “채무 재조정이 99.9% 찬성으로 가결됐다. 특별히 반대의사 표명은 없었다.” 이들 기관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오두막 집에 숨어들어온 백설공주를 ‘뜻하지 않게’ 돕게 된 난쟁이들이었다.
2015년 10월 청와대 서별관이라는 비공식 밀실에 모인 기획재정부 장관·금융위원장·금감원장 등 ‘또 다른 난쟁이들’이 4조2천억원의 세금을 옥포조선소에 집어넣었다. 동화 속에서도 난쟁이들은 백설공주를 두 번 돕는다. 당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이미 ‘독이 든 사과’를 받아들었는지 모른다. 대우조선의 최대주주인 산은은 독이 든 사과를 든 할머니처럼, 주주에서 채권자로 변신하고서 ‘마법’을 부렸다. 국민연금 오직 한 곳만 집중 공략하며 기민하게 움직였다. 국민연금도 못 이기는 척하며, 외견상으론 “연금 가입자 이익을 위해 대립을 불사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이 와중에 다른 모든 이해관계자들은 ‘책임 뒤집어쓰기’ 불똥을 맞게 될까봐 오히려 전전긍긍했다. 돈을 빌려준 채권자로서의 기세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사학연금과 우정본부는 “국민연금을 뒤따르겠다”고 흘렸고, 중기중앙회와 한국증권금융을 위시한 몇몇 투자자들이 이미 ‘동의’를 선언한 마당이라 만에 하나 부결됐을 때 쏟아지게 될 책임이 큰 두려움으로 작용했을 터다. 이번 집회에서, 기관투자자 난쟁이들의 도움으로 살아난 쪽은 기이하게도 산은이었다. 산은은 서별관 이후 1년 6개월 만에 대우조선 앞에 다시 나타났지만, 이번에는 기관투자자 난쟁이들을 압박하는 역할을 맡았다. “채무 재조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더 큰 손실을 입게 될 거”라는 위협을 들이댔다.
산은의 주도면밀한 전략이었을까? 사채권자 집회를 앞두고 산은-국민연금 진통 과정에서 오직 ‘채무조정안 통과’만 표면에 부각됐을 뿐 그 이면, 곧 ‘회사채 사기발행’은 뒤편으로 숨고 말았다. 이번 회사채는 대규모 적자를 흑자로 둔갑시킨 무려 5조7천억원의 분식회계 당시(2008~2015년)에 발행된 것이다. 말하자면 독이 든 사과를 맛본 건 백설공주가 아니라 허위 재무제표를 믿고 유혹에 넘어간 난쟁이들, 곧 회사채 투자자들이었다. 동화와 달리, 조선소 버섯 정원에서 백설공주는 유동성 위기 속에 수년째 길을 잃은 채 헤매고 있다. 물론 대우조선은 계모 왕비로부터 핍박받았다는 뜻에서의 백설공주가 분명히(!) 아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대우조선해양 사채권자 집회가 17일 오전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 서울사무소 사옥에서 열려 사채권자들 공탁서원본을 통해 본인 확인을 한 뒤 투표용지를 받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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