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5일 코스타리카의 산호세주 타라수 지역에 있는 커피 생산자 협동조합 코페타라수 연구개발실에서 직원이 커피 시향 체험을 준비하고 있다. 코페타라수는 커피의 품질 향상을 위한 연구개발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커피의 맛과 향을 개선하는 전문가들이 근무하고 있다.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 제공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에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이 포함되면서 7월13일 행정안전부를 중심으로 ‘자치분권 전략회의’가 출범했다. 김부겸 행안부 장관은 핵심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로 ‘풀뿌리 주민자치 기반 강화’를 꼽았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지역발전을 위해 채택된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골간은 중앙정부가 중심이 되어 지역사회에 물적 자본과 금융 자본을 재분배하는 방식이었다. 이제 더 이상 행정의 재정지원에만 의존하지 않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지역의 자립 구조를 만들어가겠다는 의미다. 지역의 풀뿌리공동체운동과 사회적 경제 영역이 결합하면서 행정체계의 주요한 협치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보다 앞서 사회적 경제 방법론을 지역발전 전략으로 삼은 코스타리카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사회적 경제를 통한 지역발전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코스타리카 현장을 둘러본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 김영식 사무국장이 연수기를 보내왔다.
코스타리카. 축구팬이라면 축구를 잘하는 나라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맛있는 커피를 생산하는 곳으로 손꼽히는 중미의 작은 나라다. 대한민국의 절반 정도 면적에 약 48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1인당 국내총생산(GDP)으로만 보면 중남미 국가 중에서도 평균적인 수준이다. 군대를 폐지하고 보건과 교육 분야에 투입하는 예산 비율이 영국보다 높은 것으로 유명한 영세중립국이다.
‘풍요로운 해변’이라는 뜻을 가진 나라 이름처럼 잘 보존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고, 영국 신경제재단이 선정하는 ‘행복지수’(HPI) 세계 1위를 세번이나 차지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직 낯설겠지만, 어느덧 정책을 연구하거나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나라가 됐다.
코스타리카 국가경제에서 사회적 경제가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은 상당하다. 코스타리카에서 사회적 경제는 소규모 생산자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실제로 코스타리카 전체 경제활동인구 130만명 가운데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일하는 인원은 약 20만명으로, 전체 고용의 약 16%를 차지하고 있다.
코스타리카의 대표적인 사회적 경제 조직 중 하나는 커피 생산자 협동조합인 코페타라수(Coope Tarrazu)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스타리카 커피, 그 가운데에서도 우수한 품질의 커피를 생산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이 협동조합은 1960년 228명의 영세커피농이 모여서 자본금 5800달러로 시작했다. 지금은 약 5000명의 조합원과 3600만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대규모 기업으로 성장했다. 커피의 생산과 가공, 유통까지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자체 시설을 갖추었고, 생태보호지구에서 농사를 짓는 친환경 커피 생산을 위한 연구개발에도 지속적으로 투자한다. 최근엔 주유소와 유통매장(마트), 신재생에너지 분야까지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코페타라수의 생산자로 참여하는 조합원 중 80% 이상이 경작 면적 4헥타르(㏊) 미만의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코페라타수의 카를로스 리베라 조합장은 “소규모 커피농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연대할 수 있었다”며 “커피농들이 더 나은 조건에서 생산·판매하고, 생산된 커피를 최고 품질의 상품으로 전세계에 유통시켜 조합원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사회적 경제 방식으로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동시에 지역 주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아파코프(APACOOP)도 경제적 필요를 연대와 협력으로 풀어낸 협동조합 모델이다. 커피의 대체작물을 고민하던 한 농민 가족에 의해 시작됐다. 작황에 따라 커피 원두의 가격변동이 심한 탓에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커피를 대체할 수 있는 작물로 아보카도를 선택하여 재배하기 시작했다. 점차 아보카도 생산이 늘어나면서,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원재료의 생산·판매뿐만 아니라 가공식품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판로를 개척했다. 여기까지는 어찌 보면 많은 생산자 협동조합이 흔히 거치는 경로다. 주목할 점은 아파코프가 자기 조직의 성장에만 매몰되지 않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아보카도 생산과 가공 등을 통해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회적 경제 조직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코스타리카에 농업 분야 사회적 경제 조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재생에너지 분야 협동조합인 코페산토스(Coope santos)는 1989년 설립되어 지역의 4만5천가구에 전기와 방송통신 분야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미 화력발전을 폐지한 코스타리카는 에너지의 약 95~97%를 수력발전으로 생산한다. 나머지는 지열, 태양열, 풍력발전이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경제의 핵심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코스타리카의 사회적 경제는 2014년 루이스 기예르모 솔리스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동안 다양하게 펼쳐지던 사회적 경제 영역의 활동이 좀더 조직화되고, 정부기관의 활동도 사회적 경제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사회적 경제 정책을 전담하는 중앙부처도 설치됐다. 코스타리카 정부의 사회적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노동사회보장부 사회연대경제 담당 루이스 에밀리오 쿠엥카 차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스타리카에서는 이전부터 사회연대경제가 존재해왔지만 솔리스 대통령 취임 이후로 사회적 경제 분야의 정책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지난 6월 코스타리카 대통령궁에서 루이스 기예르모 솔리스 대통령이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와 코스타리카 정부 간의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위한 교류·협력 협약식에 앞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 제공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대통령 부인인 메르세데스 페냐스 도밍고가 총괄하는 프로젝트인 ‘테히엔도 데사로요’(Tejiendo Desarrollo)다. ‘발전의 직조(織造)’라는 의미의 이 프로젝트는 사회적 경제를 중심으로 한 지역균형발전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다. 그동안 코스타리카의 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어온 지역을 사회적 경제 방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지역의 고유성과 주민참여를 강화하고, 낙후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동사회보장부, 경제정책기획부, 지역개발협의체 등 정부기관, 지방정부, 민간기업, 사회적 경제 조직, 대학과 협력구조를 만들었다.
실제로 ‘테히엔도 데사로요’가 시작된 이후, 코스타리카의 중앙과 지방정부의 지역발전 사업에서 시민들의 참여와 결정권이 확대됐다. 또한 해안지역, 산악지역, 국경 인근의 소외지역에 우선적으로 자원을 투입하도록 했다. 지방의 청년·아동·여성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기업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연계했다.
정부도 사회적 경제의 생산품과 서비스를 적극 구매하는 등 공공시장에서 사회적 경제 조직이 판로를 확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예를 들어, 농축산부에서는 농축산 분야 협동조합에서 재료를 납품받아 공립학교에 급식용으로 공급하게 했다. 이를 통해 해당 농축산협동조합은 품질에 대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됐다. 대통령실에서도 협동조합에서 커피를 공급받아 코스타리카를 방문한 국빈에게 선물로 주고 있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코스타리카 정부의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코스타리카 헌법은 경제활동에서 ‘시민의 참여와 공정한 기회’를 강조하는 사회연대경제의 정신을 담고 있다. 연수단과의 간담회를 주도한 대통령 부인 페냐스는 “코스타리카 정부가 사회적 경제 방식의 지역발전 전략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경제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경제 방식이기 때문”이라며 “한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와 코스타리카 정부 간의 사회적 경제 분야 협약으로 시작된 경제 분야 협력 역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의미있는 성과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6월 코스타리카 대통령궁에서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와 코스타리카 정부가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위한 교류·협력 협약을 체결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김영배 서울 성북구청장, 민형배 광주 광산구청장(협의회 회장), 루이스 에밀리오 쿠엥카 코스타리카 노동사회보장부 차관, 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협의회 사무총장).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 제공
이번 방문은 지난해 10월 페냐스가 서울에 사무국을 두고 있는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GSEF)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이뤄졌다. 당시 페냐스는 “한국의 사회적 경제 분야의 성취와 코스타리카가 추진해온 사회적 경제 중심의 지역발전 모델을 바탕으로 양국이 호혜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함께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며, 코스타리카를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지난 6월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회장 민형배 광주 광산구청장)와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가 공동으로 코스타리카의 사회적 경제 현장을 탐방하고, 연대와 협력을 약속하는 협약식을 열었다.
산호세(코스타리카)/김영식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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