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라씨가 지난 2015년 7월 과천시 주암동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마장마술 경기에 참가하고 있다. 과천/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가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를 위해 삼성이 구입한 20억짜리 말이 뇌물이 아니라고 본 것도 상식을 거스르는 판단이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삼성이 정씨를 위해 거액의 그랑프리급 말을 샀고, 정작 삼성은 아직 해당 말의 소유주로 등록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구나 재판부가 “삼성 소유”라고 했던 20억짜리 말은 삼성 구매 직후부터 오로지 정유라씨만이 탔고,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뒤 지금껏 독일 현지 마방에 방치돼 있다. 검찰도 최근 최순실씨의 뇌물 사건을 심리 중인 재판부에 ‘말이 뇌물이 아니다’고 본 항소심 판단을 반박하는 의견서를 낸 것으로 8일 확인됐다.
승마계와 법조계에선 정씨가 삼성으로부터 가장 먼저 받은 말인 ‘살시도’와 그 이후에 산 20억짜리 말 ‘비타나’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2015년 10월 산 살시도는 패스포트(말 소유주 기재한 명찰)에 삼성전자가 소유주라고 적혀있고, 그해 11월 최순실씨는 살시도 소유권이 자신에게 이전되지 않은 걸 삼성에 항의했다고 한다.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는 “이재용이 브아이아피(박 전 대통령) 만났을 때 말 사준다고 했지 언제 빌려준다고 했냐”며 최씨가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을 독일로 올 것을 요구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실제 그해 11월15일 박 전 사장은 박원오 전 전무를 통해 “기본적으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다는 것이고, 결정하는 대로 지원해드리겠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 결과 이듬해 최씨가 받은 20억짜리 비타나는 살시도 구매 때와 명백한 차이가 난다. 비타나와 라우싱의 패스포트에 소유주에 관한 기재는 사라졌다. 무엇보다 비타나 등의 구매대금으로 지출된 200만 유로(약 27억원)는 삼성의 자산관리대상에 유형재산으로 등재되지 않았다.
실제 1심 재판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근거로 마필 운송을 위한 차량 구매 등의 대금만 무죄로 봤고, 살시도와 비타나, 라우싱 등 마필 구매 대금 등 총 72억9천여만원이 뇌물이라고 판단한 바 있다. 하지만 항소심은 1심 재판부가 상세히 기록한 이 부분을 통째로 생략했다. 2심 재판부는 살시도와 비타나를 사는 과정에서 벌어진 이런 사정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최순실씨와 박상진 사장의 주장을 바탕으로 ‘말 자체는 뇌물이 아니며 사용 이익만 뇌물에 해당한다’고 했다.
살시도와 비타나 등을 홀로 탄 ‘사용 이익’에 대한 구체적 금액을 산정하지 않은 것도 심각한 문제로 꼽힌다. 말의 특수성을 일부러 외면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말은 차나 명품가방과 달리 ‘살아있는 생물’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시 정유라에게 최적화된 말을 고른 것으로서 정씨가 사용하지 않으면 누가 대체해 타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한창 왕성한 전성기를 맞았던 말의 ‘이용 시기’도 고려돼야 한다. 정확한 계산을 시도한다면, 사용 이익 자체도 상당한 액수에 해당할 수 있는 것이다.
2016년 7월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보도가 나온 뒤 세 말을 모두 독일 중개업자인 안드레아스에게 넘긴 과정도 석연치 않다. 그해 8월 매매계약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황성수 전 삼성전자 전무와 안드레아스 외에 최씨의 비덱 쪽 사람이 이 자리에 참석한다. 삼성과 안드레아스 사이의 매매였지만, 계약서 작성에 최씨 쪽이 관여한 것이다. 심지어 안드레아스는 부상이 심한 비타나를 1억2000만원의 ‘웃돈’을 주고 사들였다. 법조계 관계자는 “결국 이 매매계약이 형식적 계약에 불과했다는 강력한 징표”라고 꼬집었다. 서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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