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백양누리홀에서 열린 ‘글로벌 사회혁신 세미나’ 토론 모습. 왼쪽부터 이재호 <한겨레21> 기자, 송진호 한국국제협력단 기획이사, 이훈상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겸임교수, 김현주 에누마 사업팀장, 윤세미 연세대 언더우드 국제대학 교수.
“당신이 만일 가난한 나라에서 학교나 병원 중 하나만 지을 수 있다면 뭘 짓겠습니까?”
국제기구 활동가가 강연 중 이런 질문을 던졌다. 청중 대부분은 후원을 하거나 직접 현장에 나가 지구촌 이웃을 돕고 싶다는 선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교육은 그 나라의 미래세대를 키우는 일이니 저는 학교를 짓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다른 누군가는 “사람이 죽어나가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 병원이 더 급합니다”라고 받아치며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한참 후 강연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랬다. “여러분 모두 틀렸습니다. 정답은 ‘거기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한다’입니다.”
이 활동가는 자신이 던진 이야기에 대해 “그곳에서 계속 살아갈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뜻”이라며, 배경을 설명했다. 돈은 다른 나라 국민의 세금이나 기부금에서 나오고 사업은 전문가들이 기획·집행하며 영향은 주민들이 받으니, 정작 그 나라 주민들이 오히려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이미 업계에선 해묵은 지적이다. 도움이 되겠다며 남의 나라에 들어간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들이 ‘두 노 함(Do no harm·피해 끼치지 말자)’를 중요한 원칙으로 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좋은 일을 잘 하기 위해…오해와 고정관념의 산을 넘어라
다행히도, 개발협력 현장에는 이런 간극을 메우려고 열심히 뛰는 진정성 있는 사람들도 많다. ‘최선을 다하는 거로는 안 돼, 잘 해야 돼’라는 우스갯소리를 마음에 새긴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백양누리홀에 모였다. 연세대 글로벌사회공헌원, 보건전문국제개발협력NGO ‘프로젝트 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공동주관한 ‘글로벌 사회혁신 세미나’ 자리에서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개발협력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이들은 “좋은 일을 잘 하려면 넘어야할 산이 많다”며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이들이 말한 산이란 ‘오해’와 ‘고정관념’의 산이다. 돕겠다는 마음이 도움으로 이어지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들을 질문 형식으로 짚어봤다.
오해 하나 : 뭐라도 하면 나쁠 건 없지 않을까?
“단기 의료봉사 팀은 때로 피해만 입히는 경우도 많다.” 국제실명예방재단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담당자 드류 키스의 말이다. 이날 발제자로 참여한 그는 단기의료봉사를 예로 들었다. “백내장 등 수술을 하는 단기봉사팀이 많다. 한국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백내장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사후관리가 되지 않으면 실명으로 이어질 수 있어 현지 의료진이나 체계와 협의가 없을 때는 안 하는 것만 못하다.” 토론에 참여한 이재호 <한겨레21> 기자도 “우리보다 가난한 이웃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되돌아봐야 한다”며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강조했다.
“우간다의 원조 모라토리엄 사태를 뼈아프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윤상철 국립의료원 국제보건센터장의 고민도 같은 문제의식에 잇닿아 있다. 원래 모라토리엄은 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채무를 상환을 일시 정지하는 것을 말하는데, 2012년 우간다 정부는 보건의료 개발협력사업을 자국 정부와 사전 논의 없이 자체 진행할 수 없도록 했다. 당시 우간다에선 2008년부터 2009년 사이에만 스물세 개의 개별 프로젝트가 진행됐는데, 우간다 정부는 자국 정부나 지역사회와 논의 없이 자체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의 난립이 우간다를 보건의료 프로젝트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오해 둘 : 회계장부 확실한 게 최고?
“아프리카 현장에는 ‘코리안 말라리아’ 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하는 프로젝트 보고 시즌만 오면, 갑자기 현지 직원들이 말라리아에 걸렸다면서 안 나온다. 모든 비용을 영수증 처리한 뒤 스캔해 한국에 보내야하고, 몇백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만드는 등 행정 작업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교육 스타트업 에누마의 김현주 팀장이 꺼낸 말이다.
한국의 행정 과잉은 개도국 현장에서 악명 높다. “현장에서 한국과는 일 못하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의 송진호 기획이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송 이사는 “정부나 기업이 시민사회나 현지를 관리하고 통제해서는 안 된다”며 “서로의 역량을 키우는 파트너십이 필요하고, 쌓아야 할 것은 영수증·서류가 아니라 현장에 대한 이해”라고 말했다.
물론 투명한 자금 집행은 중요하다. 하지만 절차와 증빙을 늘리는 것만이 투명성을 높이는 방법이 되지 않는다고 국제사회 전문가들은 대체로 입을 모은다. 이런 방식은 사업의 질보다는 관리 편의성을 고려한 것이라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실제로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는 다른 방법도 시도하고 있다. 개별 프로젝트가 아니라 기관 자체에 대한 투명성·전문성 평가를 다각도로 진행하고, 불시에 감사를 하되 이때 문제가 나오면 다시는 자금을 지원받지 못하도록 하는 식이다. 재정 투명성을 담보하되, 행정 과잉이 오히려 사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간다 원조 모라토리엄 사태를 설명하고 있는 윤상철 국립의료원 글로벌보건센터장.
오해 셋 : 소셜벤처·사회적기업 등 새로운 방식이 좋다?
아동구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에서 7년간 근무하다 최근 태블릿피시 기반 교육앱 개발 스타트업 ‘에누마’로 자리를 옮긴 김현주 팀장은 “소셜벤처나 사회적기업이 무조건적인 대안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상황에 맞는 방법을 선택하되, 현장의 목소리와 지역의 맥락을 반영하는 오래된 진정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코이카 전문관으로 오랜 기간 아프리카 현장에서 보건의료 활동을 한 이훈상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겸임교수도 “단순히 새로운 기술이 좋다는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 그 나라에서 지속가능하게 녹아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좋은 질문은 정답보다 힘이 세다
다행히도 오랜 기간 현장 전문가들이 목소리를 높여온 덕에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코이카도 시민사회 영역에서 정부나 기업에 비판적 목소리를 높여온 송진호 전 부산YMCA 사무총장을 기획이사로 선임해 주목을 받았다. 송 이사는 “코이카가 개발도상국과 시민사회를 만나는 방식을 보조금 출연·관리형 행정이 아니라 관계형으로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날 행사에 모인 사람들이 내놓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 접근하는 ‘태도’의 진정성을 고민하자는 것. 사회 변화로 가는 길은 분절된 프로젝트의 점으로 뒤덮혔다는 말이 있다. 복잡하게 얽힌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프로젝트를 넘어서는 접근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선 개별 프로젝트를 성공사례로 남기고 과시하려는 태도를 극복해야 한다는 얘기다. 현지 사회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고, 당사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장 활동가나 전문가가 아닌,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잘 모르니까 전문가의 영역으로 남겨둬야 할까? 그렇지 않다. 바로 좋은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누가 내 돈을 떼먹나”를 질문하면 답은 “학교 지었습니다”가 된다. “정말 아이들의 삶이 더 나아졌나요?”를 물으면 아이들이 그 학교에 다니는지, 거기서 뭘 배우는지, 오가는 길은 안전한지, 졸업 후의 삶은 나아지는지도 보게 된다. 멀고도 험한 혁신으로 가는 길, 좋은 질문이 무기다. 좋은 질문은 정답보다 힘이 세다.
글·사진 박선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원 s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