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한국무역협회 무역통계(K-stat) 데이터 자료를 들여다봤더니 2017년 11월부터 수입금액·물량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확연히 달라진 한 품목이 눈에 띄었다. 관세통계 통합품목분류표(HSK) 품목코드 270900번인 ‘원유’(석유와 역청유)다. 한국의 제1위 수입품목이다. 이 품목의 미국산 수입액을 보면 2017년 1~10월까지 총 3억8200만달러였다. 그런데 그해 11월 2억2400만달러, 12월 1억1900만달러로 두 달 만에 3억4300만달러어치를 사들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서울 롯데호텔에서 우리 정부 및 에스케이(SK)·한화 등 10여개 대기업 임원들과 비공개로 만나 미국산 에너지·무기구매 금액과 일정 등에 대한 ‘확약’을 받아간 게 2017년 11월 8일이다.
2016년 연간 1억2600만달러에 그쳤던 미국산 원유 수입액은 2017년 7억2500만달로 급증하더니 작년엔 무려 44억9600만달러라는 놀라운 규모로 늘었다. 작년의 경우 2017년에 비해 520%, 2016년에 견주면 3460% 증가다. 올 들어선 1월에 5억3100만달러를 수입했다. 수입 원유의 가격이 폭등해서가 아니다. 수입물량 증가세도 뚜렷하다. 2016년 30만1천톤, 2017년 177만4천톤, 2018년 787만톤(2016년 대비 2514% 증가), 올해 1월 112만톤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작년 말에 중동산 두바이유와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의 가격 차이가 기존 배럴당 2~3달러에서 8달러까지 벌어져 미국산의 가격경쟁력이 좋아지기도 했다”며 “하지만 국내 정유사들의 정제시설이 중동산 원유에 맞춰져 있어 대부분 단기계약 형태로 미국산 원유를 들여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산 석유 거래를 금지하는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재가 지난해 11월에 복원됐지만 한국은 ‘예외’를 인정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받아 챙겨간 ‘구매 약속’ 이외에 가격·이란제재·정제설비 등 어느 요인도 ‘3400% 증가’를 설명하기엔 불충분하다.
흥미롭게도 작년 12월 미국산 원유 수입액은 9억9300만달러에 이른다. 미국 통상당국이 주목하는 연간 단위 대미 무역수지 흑자 수치를 줄이기 위해 연말에 ‘몰아치기 수입’한 흔적이 분명하다.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무역확장법 제232조에 따른 수입 보복(수입쿼터제한)을 당한 우리나라 철강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제 미국에 수출해 팔기만 하려 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심기를 건들면 언제든 무역보복을 당하는 시대가 됐다”며 “미국에 얻어맞기 전에 우리가 먼저 조심하고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작년에 미국산 제품 수입액은 통틀어 588억6800만달러로 전년동기대비 16.0% 증가했다. 2017년(507억4900만달러)에도 직전 해보다 17.4% 늘었다. 이에 따라 2013~2016년 205억~258억달러였던 대미 무역수지는 트럼프 대통령이 1월에 취임한 2017년 178억6천만달러로 갑자기 줄더니 작년엔 139억2900만달러로 급감했다. 그 바탕에는 미국산 원유 수입 증가가 요인으로 지목된다. 지난해 3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이 미국의 민감한 요구나 쟁점 없이 협상 개시 석 달 만에 예상을 깨고 타결에 이른 배경에 무역수지 축소에 대한 ‘한국의 의지와 실천’이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표면적으로 협정 개정을 요구했으나, 진짜 목적은 당장의 무역수지 숫자 개선이라는 ‘실익’에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2년간 트럼프 통상시대를 통과하면서 비교우위 분업론에 기초한 ‘공동의 이익 및 상호 호혜 자유무역’이라는 기존 통상질서·규범은 철저하게 깨지고 있다. 한-미 세탁기 분쟁의 경우, 우리가 “미국의 반덤핑 관세부과(2013년) 조처가 부당하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기한 소송에서 최종 승소(2016년 9월)했으나 미국 쪽은 지금까지도 판정 결과를 이행하지 않은 채 반덤핑 관세를 여전히 물리고 있다. 국제 통상질서·규범이나 법적 논리는 아랑곳없이 오직 자국의 이익 관철만을 위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새 질서로 재편되고 있는 셈이다. ‘판정결과는 안 따르면 그만’이라는 게 미국의 태도이고, 우리 쪽은 판정 이행 압박을 위해 맞보복을 모색할 수밖에 없으나 상대로부터 더 큰 보복을 또 당할 수 있다는 염려도 해야 한다. 유명희 신임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5일 취임사에서 “통상에서는 경제력·기술력·단결력 등이 총합된 국력이 협상력의 근원”이라며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통상분쟁 심화로 기업들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리스크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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