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일이지만 한 사람에 대한 애정과 그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신뢰가 쌓이면 팀워크는 저절로 좋아지게 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Q. 회사 생활이 15년 가까이 되니까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요구가 많습니다. 하지만 부하직원과 손발을 맞추고 협업하는 게 비효율적으로만 느껴집니다. 혼자서 남들보다 몇배의 성과를 낼 수 있다면, 그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1995년 1월 미국 대학 생활을 접고 귀국해 엘지인화원에서 근무를 시작할 때 내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혼자 자기 실력으로 남보다 몇배 더 일하는 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지요. 아마도 그건 15년간 석·박사 과정, 교수 생활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몸에 익은 습관 같은 거였던 듯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학문과 교수 생활을 버리고 회사로 왔으니 뭔가 빨리 성과를 내고 승진해야겠다는 조급함도 있었지요.
40살에 인화원 기획담당 이사로 처음 출근했을 때 나를 그리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30대 상무, 전무도 나오지만 그땐 그 나이에 임원이 되는 사람은 재벌가 중에서도 드문 일이었으니까요. 임원 자리가 하나 줄어들었으니 고참급 부장들한테는 눈엣가시였던 모양입니다.
당시 선진 기업의 임원 교육 방식을 엘지에 도입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나는 홀로 서류가방을 들고 외국으로 나가 직접 부딪쳤습니다. 부하직원을 데리고 출장을 가도 결국 내가 다 설명하고 통역까지 해야 하니까 차라리 혼자 다니면서 일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수의 기업, 경영대학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실천 학습(Action Learning) 방식의 새로운 임원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성과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해 말 리더십 평가에서 나는 아주 나쁜 결과를 받았습니다. 오로지 일 중심이고 혼자 일한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었습니다. 반면 내 입장에서는 동료나 부하직원들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리더십 평가에 크게 실망하고 자존심이 상한 채로 나를 엘지로 영입하려고 설득했던 한 계열사 사장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여보게, 자네가 (미국) 대학을 포기하고 회사로 왔는데 100미터 단거리를 뛰러 왔나, 아니면 마라톤을 뛰러 왔나?”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씀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더군요. 교수 생활을 접고 회사로 왔으니 내 실력을 발휘해 적어도 사장까지는 해야겠다는 포부가 있었지만 마음만 앞설 뿐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고치고 싶고 바꾸고 싶은 게 많은 ‘개별적인 공헌자’(individual contributor)로서만 열심히 일했던 셈이지요.
우선 15년간 대학 생활을 하면서 홀로 일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내 한계를 인정했습니다. 치열하고 치밀하게 연구하고 일하던 내 습관 탓에 동료와 부하직원들의 부족함만 보고, 이를 엄하게 조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일을 했기에 리더십 평가에서 형편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배운 게 있습니다.
‘기업은 대학과 다르다. 대학교에서는 교수로서 자기 연구, 자기 강의만 잘하면 된다. 그러나 기업에서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열정이 넘쳐도, 아무리 윗사람이 인정해도 동료와 부하직원의 자발적 동의와 협조 없이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그것이 기업이구나.’
장기적 관점·커리어 비전이 팀워크 핵심
한국으로 돌아온 지 5년 만인 2000년 당시 엘지 회장실이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구조조정본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나는 인사팀장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옆에는 재무팀, 전략팀, 법무팀, 감사팀 등이 일했는데, 당시 나는 전무이고, 다른 팀장들은 상무였지만 항상 내가 그들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인사기밀에 관한 사항을 빼고는 늘 상의하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한 3년을 꾸준히 하니까 드디어 나를 한 식구로 받아준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지요.
부하직원과의 관계도 확 달라졌습니다. 나는 인사팀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후임자를 생각했습니다. 즉 준비된 후임자 풀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당장은 눈에 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길게 보고 사람을 키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각 계열사 인사 부문원에서 직을 엄선해 미국 인적자원(HR) 부문 최고 대학 5곳의 석사학위 과정에 보내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해마다 5명씩 5년만 교육하기로 하고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16년째 운영되고 있고, 그 출신들은 각 계열사 인사담당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엘지그룹 인사 노사 교육 부문에서 일하는 1000명의 직원에게 엄청난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고요.
또 10명도 채 안 되는 인사팀원들을 한명, 한명 철저하게 조련했습니다. 일을 놓고 개별적으로 엄청난 토론을 하고 업무에서는 완벽성을 요구했습니다. 모두에게, 그리고 각자에게 세계 최고가 되라고 촉구했고, 구조조정본부 안에서 가장 분위기 좋은 팀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장차 계열사 인사담당 임원이 되는 꿈을 심어주고 업무 훈련을 통해 최고의 실력자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지주회사와 각 계열사의 임원이 되어 있습니다.
능력 있는 개인을 팀워크를 생각하며 일하도록 하고, 또 팀 리더로 키우기 위해서는 우선 장기적인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기적 관점에서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팀워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까요. 실제로 단기적으로 성과를 보려면 차라리 혼자 해치우는 게 훨씬 빠르고 효율적일 때가 많습니다.
인화원에서 간혹 똑똑하다 싶은 친구들이 인기 있는 연수프로그램을 익히고는 컨설팅을 하겠다고 밖으로 나갈 때 나는 이런 사람들은 우리 조직에 필요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조직 안에서 승부를 볼 사람만이 필요하며, 설혹 승부에서 지더라도 그 사람은 시장에서 오히려 큰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이 오랫동안 무서운 회사였던 것은 CEO(최고경영자)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다른 회사로 바로 스카우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연봉이 훨씬 높아지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너럴일렉트릭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돈을 많이 주는 회사가 아니다, 시장 최고 수준의 70% 정도로 운영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제너럴일렉트릭 출신들에게 몸값 프리미엄이 붙어 있었던 것이지요.
또 중요한 것은 커리어 비전입니다. 내가 여기서 오래 팀원으로 일하면 내게 어떤 기회가 주어질까 하는 미래의 청사진 말입니다. 이곳에서 성공적으로 은퇴할 때까지 일할 수 있다는 안정감도 중요하지만 다른 직장으로 옮기더라도 여기서 일하고 배운 것이 가장 효과적인 투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 조직, 이 팀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성찰하고 이 조직의 미션, 공유가치를 내 마음속에서부터 철저히 공감하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조직이 추구하는 공유가치가 나의 것이 되고, 이를 내 비전으로 재해석하지 않으면 조직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조직의 공유가치가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부하직원과 수시로 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일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적용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부하직원도 이 조직에서 일하는 것에 자부심과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애정이 진정한 신뢰를 이끌어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부하직원을 향한 진정한 애정입니다. 인사팀장 초기에 팀원들과 종종 부부 동반으로 공연이나 와인바를 함께 가는 등 개인적 친분도 쌓았는데 리더십 평가에서 나는 의외로 낮은 점수가 나왔습니다. 돌이켜보니 일을 통해서 강하게 조련시키는 게 팀원들을 성장시키고 이들의 미래를 밝혀주는 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들이 내게 목말라 있던 것은 ‘아이 투 아이’(eye to eye)의 애정이었습니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 그 존재 자체에 관심을 보였던가, 자문했더니 그 답은 ‘아니다’였습니다. 팀원들은 진심으로 한 인간으로서 관심이 있는 건지, 일을 잘하자고 못하는 것에 대한 평가에만 관심이 있는 건지 금방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나는 그때부터 팀원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의 가슴을 느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점차로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내 상사는 나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는 신뢰가 생기니까, 내가 아무리 일을 놓고 야단을 쳐도 팀원들이 상처를 입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결과물 수준도 상당히 올라갔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별로 지시할 것이 없을 정도로 이심전심이 돼 일이 저절로 돌아갔습니다. 초기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한 사람에 대한 애정과 이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신뢰가 쌓이면 팀워크는 저절로 좋아지게 됩니다.
▶이병남.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조지아주립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다 1995년 엘지(LG)그룹 임원으로 입사해 인사, 교육, 노사관계 및 지배구조 업무를 맡았다. 2008년 사장 승진하면서 인화원장으로 부임해 8년간 원장직을 수행하고 2016년 퇴임. 인간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지만 이를 풀어낼 해법 역시 인간에게서 비롯된다는 그의 경영 철학은 저서 <경영은 사람이다>(2014)에 담겼다. 인간존중이라는 경영의 본질을 잊지 않고 21년간 숨 가쁘게 현장을 누벼온 그가 일터에서 겪는 우리의 고민을 함께 나눈다. 4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