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은 부서에서 같이 일하기 싫은 상사를 만나는 게 너무 싫지만, 가족의 생계 유지를 위해서 출근해야 할 때 애초에 왜 이 회사에 들어왔는지를 생각해보자. 게티이미지뱅크
Q. 일요일 밤이면 잠들지 못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할 때도 있습니다. 일하기 싫은 부서에서 같이 일하기 싫은 상사를 만나는 게 너무 싫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탓에 함부로 사표를 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제가 현직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간 해외출장지가 요르단이었습니다. 암만 상공회의소장의 요청으로 회원사 최고경영자(CEO)들을 위한 특강을 했는데, 청중석에 100여명 정도의 관중이 있더군요.
요르단이 중동에서 비교적 개방적인 나라여서인지 여성도 2~3명 눈에 띄었습니다. 강연 끝부분에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한 여성 시이오가 물었습니다.
“강연자님에 대한 자료를 보고 강연을 들어보니 매우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온 것 같은데, 그 비결이 무엇인가요?”
“소명의식과 인욕(마음을 가라앉혀 온갖 욕됨과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음)이요!”(Sense of mission and perseverance!)
생각할 시간도 갖지 않고 즉각 답하는 저 스스로에게 놀랐습니다. 평소에 의식하진 못했지만 이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소명의식’은 저 스스로가 부여한 사명이기도 하지만 선진기업을 만들겠다는 비전과도 합치됩니다. 1980년 이후 외국에서 오래 연구 생활을 하면서 쌓아온 소망은 내 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올라 세계 어디에 대한민국 여권을 내놓아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국민과 같은 대접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에서 미국 기업의 경영 혁신 사례를 보면서 한국 기업이 아이디어와 기술, 브랜드로 우뚝 설 때 국격도 크게 높아지리라 생각했습니다. 15년 만에 귀국해 대학이 아닌 기업에 터를 잡으면서 ‘명실상부한 선진기업이 되도록 그동안 연마한 모든 것을 바치자!’고 다짐했습니다.
상사의 트집, 헌신 요구에서 배운 것
나름대로는 열심히 일했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몇 가지 고비를 꼽아보면, 첫째 회의나 업무 과정에서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상사의 트집 잡기와 비꼬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들이받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르는데, 그 분을 참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 상사가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숨을 쉴 수 있었지요.
또 다른 상사는 저를 견제하려고 잡다한 일만 시키고 결재라인에서 사실상 배제했습니다. 임직원들이 그 눈치를 보느라 제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수모를 1년 가까이 당했습니다. 당시 아침에 출근하는 게 너무나 고역이었습니다.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또 하루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저는 멘토를 찾아가 사의를 표했습니다. 멘토는 조금만 더 견뎌보라고 하는데, 뭔가 변화를 계획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그해 연말 인사이동을 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제가 소위 ‘힘 있는’ 자리로 옮기자 나를 힘들게 하던 그 상사의 태도가 순식간에 호의적으로 바뀌더군요. 그때 인간에 대한 저의 생각이 한 뼘은 자란 것 같습니다. 간혹 사람은 옳고 바른 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자기 이익과 야심에 따라 순식간에 태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지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룹 계열사의 한 최고경영자가, 제가 원칙을 고집하며 자기 입맛에 맞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며 전화로 온갖 욕을 퍼부었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질책하고 무안 주는 일도 반복되었습니다. 억울함이 밀려왔습니다. 멘토를 만나 하소연하고 마음을 달랬습니다. 멘토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티나지 않게 저를 보호해주었지요. 그래서 조직 생활에서 신뢰하는 단 한 사람의 멘토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그 수모와 모욕을 어떻게 참았을까. 돌이켜보면 멘토의 도움과 최고인사권자의 신뢰가 큰 힘이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내가 가진 소명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 소명의식이 있었기에 현실적인 욕됨을 참았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소명의식이 있어도 그걸 현실에서 이루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욕됨을 참지 못하면, 그것은 한 자락 뜬구름처럼 그냥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일상에서 겪는 욕됨은 선하고 바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소명의식 없이는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소명의식으로 인욕할 수 있고, 인욕함으로써 소명의식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명의식과 인욕은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출근하기 싫은 날들을 견뎌내고 있다고 했지요. 이 고통을 마주하는 현명한 방법은 애초에 왜 이 회사에 들어왔는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부서도 있을 수 있지만, 더 크게 회사 자체에 대해 스스로 부여했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지요. 이 회사는 무슨 가치를 추구하는 회사이고, 나 자신은 이 회사에서 일함으로써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지 짚어보십시오. 자신이 선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사가 필요로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회사의 결정을 존중하게 됩니다. 길게 보면 개인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조직 관점도 대단히 중요하지요. 내가 일하는 곳에서 어떻게 일하는 것이 좋은지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부서를 새로 만든다, 존재 이유를 다신 쓴다, 일하는 방식을 새로 정립한다, 일 자체를 새로 정의한다라는 자세로 해보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출근하기 싫고 배치받은 부서가 싫고 또는 상사가 일 시키는 방식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소명의식, 인욕과 더불어 나를 넘어서는 객관적인 조직 관점을 견지하면 결국은 더 큰 성과를 이루고 개인적인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하기 싫은 일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보람을 느낄 때가 있답니다. 그룹 인사팀장으로 일을 시작하고 보니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것을 상사가 아주 싫어했습니다. 해외출장도 다른 임원을 보내라 하고, 일과 관련한 네트워킹을 위한 외부 모임에 가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내가 맡은 일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완전한 헌신’을 원한다는 메시지였지요. 처음에는 너무 답답하고 서운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상사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요. 그런데 오로지 맡은 일에만 집중하니 전에 보이지 않던 문제들, 놓쳤던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차차 업무에 대한 생각의 깊이와 인사이트가 더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프레임 바꾸자 역할의 의미 달라져
하기 싫은 업무도 패러다임을 바꾸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답니다. 인화원에서는 1년에 몇 차례 수백 명씩 참가하는 대졸 신입사원 교육이 있었습니다. 한 반에 20명 정도로 나눠 여러 세션들로 교육하니, 각 반을 이끄는 수십 명의 ‘지도선배’가 필요했습니다. 주로 인화원 직원들이 맡았는데 피로도도 높고, 다른 교육과정에도 지장이 생겼습니다. 계열사에 지원 요청도 했지만 인사 업무를 맡은 직원들만 거의 되풀이해 파견왔지요.
그래서 우리는 운영 방식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우선 지도선배의 의미를 신입사원들이 함께 지내면서 배우고 싶어하는 롤모델의 역할로 정했습니다. 이에 다양한 현업 부서의 대리·과장급의 우수 관리자로 한정해 신청을 받기로 했습니다. 마침 각 계열사에서는 젊은 우수사원과 관리자들을 선발해 리더로 기르는 ‘영(Young) HPI’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각 계열사를 설득해 이 프로그램의 실행 과정 프로그램에 지도선배 역할을 포함하기로 합의했지요. 억지로 뽑혀 신입사원을 관리·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선발된 선배들이 후배를 리드할 기회로 프레임을 바꿔버린 것이지요. 노동을 놀이로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할까요. 이처럼 기업교육에서는 선발이 초기 동기부여에 가장 큰 역할을 합니다.
새 제도에 따라 계열사에서 선발된 지도선배들을 오리엔테이션하는 날, 한 직원이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혹시 인화원의 인건비 절감을 위해 계열사 인원을 동원하시는 건 아닌지요?”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지요. “당신을 리더로 만들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지고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집중 모드로 전환되었습니다. 발상을 바꾸니 모두에게 윈윈이 된 것입니다.
▶이병남.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조지아주립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다 1995년 엘지(LG)그룹 임원으로 입사해 인사, 교육, 노사관계 및 지배구조 업무를 맡았다. 2008년 사장 승진하면서 인화원장으로 부임해 8년간 원장직을 수행하고 2016년 퇴임. 인간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지만 이를 풀어낼 해법 역시 인간에게서 비롯된다는 그의 경영 철학은 저서 <경영은 사람이다>(2014)에 담겼다. 인간존중이라는 경영의 본질을 잊지 않고 21년간 숨 가쁘게 현장을 누벼온 그가 일터에서 겪는 우리의 고민을 함께 나눈다. 4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