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경영자들 발벗고 나서 ‘개화기’ 활짝…한단계 끌어올려야 ‘만개’ 연초 삼성의 사장단 인사가 재계에 조용한 화제를 몰고왔다. 삼성의 사회공헌을 책임지는 사회봉사단에 사장직이 신설된 것이다. 국내에서 사회공헌을 전담하는 최고경영자가 임명되기는 처음이다. 선진국 글로벌기업들이 사회공헌을 책임지는 임원을 부회장이나 사장급으로 두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이는 삼성이 지난해 이후 부쩍 높아진 사회적 비판을 의식해 사회공헌을 강화하려는 뜻도 작용했겠지만, 최근 사회공헌을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받아들이는 기업들의 인식전환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한국의 기업 사회공헌은 화려한 ‘개화기’를 맞고 있다. 지난 2003~2004년 기업 사회공헌이 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지 불과 2~3년 만이다. 삼성, 에스케이, 현대차, 교보생명 등 주요 기업들은 최고경영자까지 전면에 나서 사회공헌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각 기업들은 사회적 지원효과가 크고, 국민의 눈길도 끌 수 있는 독창적인 사회공헌 프로그램 개발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국내 기업의 본격적인 사회공헌 프로그램은 1984년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가 효시로 꼽힌다. 삼성은 1994년 국내 최초의 사회공헌 전담조직인 사회봉사단을 출범시킨 뒤 지난 10여년간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기업들의 사회공헌 강화 움직임은 올해 관련 예산에서 확인된다. 삼성, 에스케이 등 사회공헌을 주도하고 있는 주요 기업들은 불확실한 경영여건 속에서도 사회공헌 예산을 지난해보다 늘릴 계획이다. 올해 기업 사회공헌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내실화’ 노력이다. 곽대석 CJ 사회공헌팀장은 “그동안 양적 확대에 치중해 왔다면 앞으로는 질적 향상에도 신경쓰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의 사회공헌 프로그램 차별화 노력도 같은 얘기다. 에스케이텔레콤의 김도형 부장은 “오직 우리 회사만이 할 수 있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개발하라는 최고경영자의 요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은 각 계열사별로 사회공헌 전담팀을 구성할 계획이다. 한화, 삼성 등이 임직원들의 자원봉사 활동을 강화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황정은 삼성사회봉사단 부장은 “자원봉사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데 효과가 크고, 사회공헌을 기업문화로 정착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사회공헌 강화도 예년과 다른 특징이다. 이는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글로벌경영을 강화하고 있는 현대기아차과 에스케이, 포스코 등이 좋은 사례이다. 그동안 일부 기업들의 사회공헌은 ‘보여주기’ 내지 ‘일회성 시혜’라는 지적을 받아 왔다. 그런 면에서 각 기업들이 올해 화두를 내실화와 자원봉사 강화 등으로 잡은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과제 역시 만만치 않다. 기업 사회공헌의 바탕은 ‘사회적 책임(SR)’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구성하는 요소는 사회공헌 외에도 환경보호, 준법경영, 윤리경영, 종업원들의 노동권 인정, 중소 협력업체와의 상생, 지배구조, 소비자 보호 등 다양하다. 이채욱 지이(GE)코리아 회장은 “지이의 사회적 책임을 구성하는 8대 영역은 지배구조, 글로벌 이슈, 종업원 인권, 제품 안정성, 윤리경영 등 다양하고, 사회공헌은 그 중 한가지”라고 말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윤리경영, 투명경영, 사회공헌을 각각 강조하지만, 실천은 따로 따로다. 심지어 앞에서는 최고경영자가 고무장갑에 털모자를 쓰고 달동네 독거노인들의 월동용 연탄을 나르며 굵은 땀을 흘리면서, 뒤에서는 불법자금 제공, 분식회계 등을 버젓이하는 기업들도 있다. 미국에서 엔론 등 대규모 회계부정 사태 이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많아진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양용희 교수(호서대)는 “사회공헌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이지만, 전부는 아니다”면서 “국내 기업들도 사회공헌 활동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차원으로 한단계 끌어올려 통합적이고 전략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의 국제 흐름을 보더라도 이를 더이상 늦춰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많다. 국제표준화기구인 ISO 주관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책임 국제표준 제정 작업이 성과를 거둬, 올해 안에 시안이 확정될 예정이다. 오는 2008년 시행까지는 2년이 남았을 뿐이다. 사회적 책임의 범위는 부패방지, 환경보호, 노동 관련 등 광범위하다. 국제표준은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제 규범이기 때문에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국제거래에서 불이익을 받을 공산이 높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서 존경받는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가 저임금과 무노조경영으로 인해 불매운동이 확산되면서 곤욕을 치루는 것은 좋은 실례이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6월 민관합동으로 사회적 책임 표준화 포럼을 발족해, 우리에 적합한 사회적 책임 표준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기업들의 인식은 아직 낮은 게 현실이다. 김영호 표준화 포럼 회장(유한대 학장)은 “앞으로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하면 기업은 물론 국가 경쟁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보스턴대 부설 기업시민센터의 브레들리 구긴스 교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제대로 하면 기업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위험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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