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연 기자
현장에서
“뼈아픈 반성으로 받아들인다.”
지난 24일 확대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금융기관 보신주의”가 서민경제를 더 어렵게하고 있다고 질책하자,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금융권은 안 잘리고 오래하는 것이 최고인데 왜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냐는 식”이라며 대통령의 발언을 거들었고, 신 위원장은 “원래 책임지기 싫어하는 분야라 그렇다”고 동조했다.
이날 대통령은 금융기관의 보신주의를 질타했지만, 금융권 안팎에선 신제윤 위원장의 ‘보신주의’가 입길에 오르고 있다. 대통령의 한마디 말에 반성으로 일관한 그의 태도에 대해 금융당국 안에서도 적잖은 이들이 혀를 내두른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금융회사들이 외국에 견줘 리스크가 큰 대출을 기피하는 경향이 일부 있긴 하지만, 외환위기와 신용카드 대란, 부실 저축은행 사태 등을 겪으면서 얻은 교훈이 있기 때문 아니냐”고 말했다. 무엇보다 금융기관의 건전성 및 시장의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 금융당국 수장의 처신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같은 날 정부는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율(DTI)을 완화하겠다는 방안을 밝혔다. 이 방안이 확정되기까지, 신 위원장은 실세 부총리 한마디에 평소 소신은 과감하게 접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는 지난해 3월 취임 직전 인사청문회에서 두 규제를 완화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이후, 지난 달 9일 출입기자들과 만날 때까지만 해도 같은 태도를 지켰다. 10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에 대한 우려를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금융위원장으로서 엘티브이·디티아이 완화는 그의 표현대로 “당연히 안되는 것”이었다.
두 규제 장치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한시적 완화 조처를 제외하면 비율 조정으로 본격 완화된 적은 없다. 디티아이는 2009년 수도권 비투기지역에도 새로 적용되는 등 규제의 근간이 계속 강화되는 추세였다.
사정이 달라진 것은 6월13일 최 부총리가 내정되자마자, 규제 완화 필요성을 내비치면서다. 신 위원장은 규제 완화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오다가 6월1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검토하겠다”고 운을 뗐다. 급기야 지난 7일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선 “(엘티브이·디티아이) 비율의 적정성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쪽으로 돌변했다.
금융위는 규제 완화 방안이 최종 발표되기 직전에도 “디티아이만큼은 안된다”며 버티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이 역시도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이미 지난달 금융위가 엘티브이·디티아이 규제를 없애고 은행 자율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한 사실이 최근 밝혀지기도 했다. 일찌감치 규제 완화를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얘기다. 신 위원장은 ‘유임’과 ‘교체’의 기로에서 실세 부총리의 지침에 부응해 ‘자리보전’에 나섰다는 의혹을 반박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빚내서 집도 사고 소비도 늘리라’는 주문에 금융위원장마저 동조했다는 비판이 한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게 됐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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