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금융당국이 주인 없는 은행권에 대한 최고경영자(CEO) 선임 규제는 강화한 반면에, 재벌 계열이 많은 2금융권 금융회사들에 대해선 이런 규제를 적용받지 않도록 특혜를 줬다. 시이오 선임 절차의 투명성을 높이도록 한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 설치 의무를 제외해준 데 이어 시이오의 자격 요건도 금융회사 경험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 쪽으로 완화했다. 일부 야당 의원들은 이번에 제외된 내용을 법률로 재추진할 방침이어서, 금융위원회의 ‘재벌 봐주기’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금융위는 24일 정례회의를 열어 이런 내용을 포함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보고한 뒤, 시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모범규준 시행에 따라, 각 금융회사는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가 열리기 20일 전까지 지배구조 관련 연차보고서를 공시해야 한다.
금융위는 지난달 20일 자산 2조원 이상 금융회사 118곳에 대해 동일하게 모범규준을 적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삼성 등 재벌 그룹들의 강력한 반발로, 시이오 후보군을 사전에 발굴하고 검증하는 구실을 맡게 될 임추위 설치 의무는 은행 및 은행지주사 29곳에만 부여하기로 했다. 2금융권에 대해서는 중장기적으로 적용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현재도 은행과 은행지주사는 행장이나 회장을 선출할 때 임추위를 두고 있다. 이번 모범규준 시행에 따라, 시이오뿐 아니라 이사회가 정한 임원에 대해서도 임추위를 가동해야 한다. 주로 그룹 사장단 인사 차원에서 총수 일가의 의중에 따라 시이오를 결정해온 재벌 계열 2금융권 회사들에 견줘 상대적으로 엄격한 절차를 두고 있던 은행에 대해서만 지배구조 규준이 더 강력해진 셈이다.
대신 금융위는 ‘재벌 봐주기’라는 비난 여론을 의식해, 시이오 승계 프로그램 운용은 2금융권에도 적용한다는 어정쩡한 절충안을 내놨다. 원래 임추위 신설과 시이오 승계 프로그램은 한묶음이다. 시이오를 어떤 절차와 방식으로 선임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운 뒤 임추위가 후보군 관리 및 추천 절차 등 세부적인 승계 업무를 맡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임추위가 없는 2금융권의 경우, 이사회가 형식적 수준에서 시이오 승계 원칙을 마련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는 금융회사 시이오 자격 요건도 완화했다. 애초 원안에서는 ‘금융회사에 대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고 명시했지만 수정안에서는 ‘금융에 대한 경험’으로 범위를 넓혔다. 이렇게 되면, 금융회사에 몸담은 적이 없지만 간접적인 금융 관련 경력이 있는 비금융 계열사 출신을 시이오로 앉히거나 관료 출신이 내려올 수 있는 통로가 보장된다.
금융위 관계자는 “(삼성 등에서) 원래는 모범규준에서 더 많은 부분을 제외해 달라고 요구해왔다”며 “시이오 승계 프로그램도 면제해 달라거나 시이오 자격 요건에서 아예 ‘금융’을 빼 달라는 요구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연말 금융회사에서 일한 경력이 없는 인사를 금융계열사 사장에 임명해 자격 요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김기식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이날 논평을 내어 “재계의 반발과 업계의 로비에 굴복해 정부가 추진하던 정책의 방향이 뒤집힌 것으로, 금융위가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갉아먹었다”고 비판했다. 민병두 의원(새정치민주연합)도 임추위 설치 의무 등을 동일하게 2금융권에도 적용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금융회사 지배구조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황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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