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추천 사외이사 후보자가 선임될 경우, 비재무적 위험을 완화해 기업가치를 높일 것이다.”(케이비(KB)국민은행 노조)
“(의결권 자문사인) 아이에스에스(ISS)의 반대 이유에 동의한다. 주주가치 제고가 가장 중요한데 그 점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케이비금융 주주)
지난 23일 서울 영등포구의 국민은행 여의도본점에서 열린 케이비금융지주 정기주주총회에선 ‘근로자 추천 이사’ 선임 안건을 두고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다. 이 안건을 주주제안 형식으로 낸 노조 쪽은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한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경영학)의 전문성과 비정부기구(NGO) 활동 이력 등을 열거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의결권 자문사와 최대주주인 연기금이 반대하면서 부결됐다.
이날 케이비금융지주를 포함한 상장사 540여곳이 주총을 열면서 올해 정기주주총회가 반환점을 돌고 있다. 상당수 상장기업들은 의결권을 대리 행사할 수 있도록 한 ‘섀도보팅’ 제도 폐지 이후 열린 첫 주총에서 안건 통과를 위한 의결권을 확보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또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책임을 강조하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따라 거수기 투표의 오명을 쓰지 않으려는 기관투자자의 적극적 행보가 두드러졌다.
■ 소액주주 모시기 나선 상장사들
소액주주의 지분율이 높은 기업들은 의결 정족수가 부족할까봐 ‘주주 모시기’에 나서야 했다. 보통결의 기준 정족수가 충족되려면 의결권 주식 수의 4분의 1 이상, 출석한 주주 과반의 동의가 필요하다. 대주주 지분이 10%에 못 미치는 기업들은 주총 성립을 위해서라도 공을 들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주총 개최일이 종전보다 다소 분산됐고 전자투표 이용 주주 수도 큰 폭으로 늘었다. 그동안 기업들이 몇몇 날짜에 집중해 주총을 여는 ‘슈퍼 주총일’은 사실상 소액주주의 주총 참여를 봉쇄하는 기능을 했다. 올해 가장 많은 기업이 주총을 여는 사흘간(3월22·23·28일)에 집중된 비중은 지난해 70.6%에서 올해 60.3%로 낮아졌다. 전자투표로 의결권을 행사한 주주도 지난 23일 기준 2만8655명으로 지난해 정기주총 전자투표 이용자 수(1만938명)보다 2.6배 늘었다.
30일 주총을 여는 에스케이(SK)증권은 소액주주 지분이 85%(약 6만5천명)에 달한다. 보름 넘게 소액주주들에게 연락을 돌리거나 직접 방문해 주총장에 나와달라고 설득하거나 위임장을 받고 있다. 이들은 주총 소집 공고에서 “의결권 정족수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가능한 한 가장 늦은 날(3월30일)에 주주총회를 개최하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주총장에 직접 참석하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투표할 수 있는 전자투표도 도입했다.
소액주주 지분이 77%인 한 코스닥 상장사도 소액주주 가운데 개별 연락이 닿는 이들에게 일일이 접촉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섀도보팅 폐지로 특수를 만난 한 대행업체 사장은 “주총 시즌에 주로 활동하는 업체가 5개 정도였는데, 섀도보팅 폐지로 10곳 정도로 늘어났다”며 “이번 주총을 앞두고 의결권 위임 관련 연락이 10배 넘게 왔는데, 일손이 모자라서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장사들의 위기감은 일부 현실로 이어졌다. 22일 기준 영진약품, 칩스앤미디어 등 7개사의 주총에선 정족수 부족으로 안건이 부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계열사 주총일을 하루에 몰아서 치러온 에스케이와 한화는 이번에는 그룹 차원에서 주총일 분산과 전자투표 시행에 나서 눈길을 끌었다. 지난 20일 주총을 연 에스케이이노베이션의 경우 전자투표로 의결권을 행사한 주식 수가 77만주를 넘겼다. 이런 영향으로 이번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전체 주식 수는 발행 주식의 80.7%인 7468만여주로, 지난해와 견줘 169만주 정도가 늘었다. 두 기업 모두 “주주친화 경영의 일환”으로 선도적으로 도입했다고 밝혔지만, 속내는 다른 데 있다는 해석도 나왔다. 재벌 대기업이 정족수 부족을 걱정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고질적인 두 그룹의 ‘총수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주친화 제스처’에 나섰다는 얘기다. 과거 국민연금은 각각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과 김승연 한화 회장의 횡령·배임과 과도한 겸직 등을 이유로 이사 선임에 반대한 바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소액주주 참여를 독려할 유인을 못 느끼는 기업이 더 많아 보인다. 금융위원회 집계를 보면, 지난해 12월 결산 상장사 1947곳 가운데 810곳(41.6%)이 주총일이 집중된 상위 3개 날짜에 주총을 열면서 전자투표도 도입하지 않았다. 의결권 자문사 서스틴베스트의 이왕겸 이사는 “기관 참여만으로 정족수를 채울 수 있는 기업들은 소액주주 참여를 이끌 전자투표를 도입하지 않고, 기관투자자에 위임장을 받아내거나 투표를 독려하는 방식으로 선회하고 있다”며 “전자투표를 의무화하는 것도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 두배 늘어난 의결권 안건 분석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본격화하면서 자산운용사들의 안건 분석과 의결권 행사도 예년보다 늘어날 전망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steward)처럼 고객이 맡긴 돈을 관리하는 기관들이 수탁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 지침이다. 주총 안건에 대해서도 그동안의 ‘거수기’ 구실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한 것이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지난해 주총 의결권 안건 분석이 70건이었는데 올해 130건으로 늘렸다. 트러스톤자산운용 관계자는 “이전보다 안건 분석 대상 기준을 확대해 자산 1% 이상 또는 투자금 100억원 이상으로 적용했더니 2배 가까이 늘었다”고 말했다. 기존엔 자본시장법에 따라 의결권 행사 공시 기준인 5% 이상 또는 100억원 이상에 해당되는 의안만 분석했다고 설명했다.
‘스튜어드십 코드’ 본격 도입
자산운용사들 적극적 안건 분석
트러스톤, 작년 70건→올해 130건
KB는 투자사에 질의서신 보내
의결권 자문사 영향력 커지기도
최근 케이비자산운용은 주총을 앞두고 투자 기업인 골프존에 대해 브랜드 로열티 비율이 과도하다고 판단해 그 배경과 현재 수준의 신규 투자 계획에 대해서 답변을 요구한 바 있다. 케이비 쪽이 투자사에 서신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대한 질의와 답변을 누리집에 공시했다. 이 역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따른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안건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의결권 자문사의 영향력이 종전보다 커지고 있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특히 외국인 주주가 많은 상장사일수록 의결권 자문사의 영향력이 큰 편이다. 세계적 의결권 자문사인 아이에스에스가 대표적이다. 아이에스에스는 케이비금융 주총에선 근로자 추천 사외이사 선임에 대한 반대 입장을, 하나금융 주총에선 김정태 하나금융그룹회장 3연임에 대한 찬성 입장을 사전에 밝혔다. 두 안건 모두 각 회사에선 이번 주총에서 세간의 관심을 모아온 쟁점이었다.
국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자산운용사들은 대부분 국내 의결권 자문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서스틴베스트 등이다. 한 연기금 관계자는 “내부 안건 분석 인력이 부족해 자문사 의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극히 일부의 경우를 빼면 대부분 자문사 의견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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