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청. 출처=pixabay/baragaon22
국회가 은행법, 보험법과 같이 별도로 암호화폐(가상자산) 산업을 규정하고 담당 부처를 정하는 가상자산업권법 논의를 본격 시작했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던 암호화폐가 제도권에 편입되고, 시세조종 등 불공정거래를 처벌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 13일 가상자산업법안(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가상자산업 발전 및 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안(김병욱 민주당 의원), 가상자산 거래에 관한 법률안(양경숙 민주당 의원),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강민국 국민의힘 의원) 등 4개 법안을 상정했다. 이 법안들은 빠르면 8월, 늦으면 9월 열릴 정무위 법안소위에 회부된다.
규제 대상이 되는 주요 가상자산 사업자는 암호화폐 거래소, 수탁, 지갑 서비스다. 지난 3월 개정 시행된 특정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에 관한 법률(특금법)에 따라 모든 가상자산 사업자는 금융위원회에 신고한 후 영업해야 한다. 국회에 발의된 가상자산 관련법은 이 신고 의무를 사업 형태별로 세분화해 등록, 인가 대상을 추가했다.
이용우 의원은 암호화폐 거래소는 가장 높은 단계인 인가를 받고, 수탁·지갑 기업은 한 단계 낮은 단계인 등록을 하게 했다. 김병욱 의원은 거래소와 수탁 기업은 등록, 나머지 가상자산 관련 기업은 신고 대상으로 넣었다. 고객의 자산을 보관하지 않는다면 온라인 쇼핑몰 등 통신판매 사업자처럼 신고만 해도 영업을 허용하자는 취지다. 강민국 의원은 암호화폐 발행사를 등록 대상에 넣었고, 양경숙 의원은 모든 가상자산 관련 기업에 인가를 의무화한 다소 강한 규제를 적용했다.
암호화폐 거래소 진입장벽도 현행 특금법보다 강화했다. 지금은 정보보호 관리체계(ISMS) 인증과 ‘은행 실명입출금 계정’이 있으면 금융위에 신고할 수 있다. 발의된 많은 가상자산법안은 자기자본금이 5억원 이상인 기업만 인가, 등록을 신청할 수 있게 했다. 최소 자기자본금을 30억원으로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한 법안(양경숙 의원)도 있다.
시세조종과 같은 불공정거래행위를 금지하고, 위반한 사업자를 처벌할 법적 근거가 생긴다는 점도 가상자산업권법이 가져올 중요한 변화다. 암호화폐는 자본시장법상 금융투자상품에 속하지 않아, 암호화폐 발행사나 거래소 관계자가 내부정보로 부당 이득을 취해도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다.
지난달 김병욱 의원이 개최한 토론회에서, 한 암호화폐 발행사 출신 직원은 발행사, 거래소, 시세조종 세력이 공모해 ‘펌핑 앤 덤핑’을 반복했고 가격을 끌어올린 뒤 팔아왔다고 내부 고발했다. 그는 “거래소도 거래 수수료를 안 내도 되는 일명 ‘슈퍼 계정’을 세력에 제공해 시세조종을 도왔다”고 했다.
이용우 의원은 “자전거래와 선행매매 등 시장 질서 교란 행위가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나는데, 이를 자금세탁 방지와 테러자금조달 방지만을 목적으로 하는 개정 특금법만으로 모두 다룰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별도 가상자산업권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불공정행위를 사전 예방하기 위한 자율 감시 의무를 명시한 법안도 있다. 김병욱 의원은 거래소가 △상장된 코인의 호가 △상장 코인의 발행인 등에 대한 신고 또는 공시 △이외 가격 및 거래량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등을 수시로 감시하고, 그 결과를 가상자산업협회에 정기 보고하도록 했다.
정무위 수석전문위원은 검토보고서에서 “4개 법안은 자본시장법상 불공정거래행위 금지 원칙 일부를 가상자산 사업자에게도 도입하려는 것으로, 가상자산 시장의 규제 공백에 따른 불공정거래로 인한 이용자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입법 취지가 합당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국회가 입법 논의에 속도를 내는 것과 달리, 정부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특히 금융위는 특금법 이외의 가상자산업권법을 만드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모양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정무위에서 “가상자산업법 제정이 자칫 정부가 직접 가상자산을 제도화하거나 공인한다는 잘못된 신호를 시장에 줄 수 있어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은 위원장은 “가상자산 사업자 등록과 같이 특금법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건 금융위가 담당하지만, 국회에 발의된 여러 가상자산 관련 법안에는 완전히 금융위 소관이라고 하긴 어려운 면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정부안을 마련한다면 국무조정실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기획재정부 등 관련 부처 의견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정부안을)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금융위가 가상자산 주무 부처가 아니라는 기존 입장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금융위는 계속 가상자산 주무 부처가 아닌 주관 부처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천천히 가려고만 하는데, 그게 오히려 시장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윤 의원은 “정부가 나서서 가상자산 산업, 특히 거래소와 관련한 불확실성을 빨리 없애 줘야 하는 시점에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져야 한다’는 지나친 공포감을 (금융위가) 가진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규제 공백으로 투자자 피해가 계속 반복될 수 있단 우려도 나온다. 암호화폐 투자 열풍이 처음 불었던 2017, 2018년에도 암호화폐를 정의하고 불법행위를 규제하는 법안이 국회에 다수 발의됐지만,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모두 폐기됐다. 김병욱 의원은 “엄청난 거래대금을 수반한 산업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존중해, 투자자를 보호함과 동시에 블록체인 기술 기반 산업은 육성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연착륙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인선 코인데스크 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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