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9일(현지 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신제품 공개 행사에서 ‘아이폰6S’와 ‘아이폰6S 플러스’를 소개하고 있다.
“머지않아 다시 펜 입력 방식을 찾게 될 거예요. 특히 우리나라와 중국·중동처럼 한 글자를 디지털화하는데 2바이트가 필요한 언어를 쓰는 곳에서는 반드시 펜을 찾게 돼 있어요.”
2011년 3월 스페인 바르셀로나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행사장을 찾은 최지성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장(당시는 사장, 지금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이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를 악문 채 한 말이다. 당시 삼성전자는 아이폰 바람에 밀려 스마트폰 신제품의 핵심 입력 기술로 준비하던 감압식 펜 입력 방식을 버리고, 손가락을 이용하는 정전식 터치 방식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채택했다.
최 사장은 “당장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남이 만들어놓은 콘텐츠를 이용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곧 콘텐츠를 직접 만들겠다고 덤비게 될 것인데, 그때는 반드시 펜 입력 방식이 채택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그는 “삼성전자는 앞으로 펜 입력 방식 기술을 계속 붙들고 발전시켜나갈 것”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5년 뒤, 최 사장의 ‘예언’이 현실화했다. 애플이 드디어 펜 입력 방식을 채택했다. 애플이 지난 10일 공개한 태블릿 신제품 ‘아이패드 프로’에는 키보드뿐만 아니라 ‘애플 펜슬’이란 펜까지 달렸다. 스마트폰 신제품 ‘아이폰6S’와 ‘아이폰6S 플러스’에도 정압 기술이 채택됐다. 최 사장의 예언대로다. 더욱이 2011년 당시는 삼성전자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애플을 따라갔으나, 이번에는 애플이 마지못해 삼성전자를 따라온 꼴이다. 삼성전자는 갤럭시노트부터 펜 입력 방식을 채택해왔다.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 한겨레 자료사진
애플의 이번 신제품에서 ‘대화면’도 추구했다. 아이패드 프로의 화면 크기는 무려 12.9인치(대각선 기준)나 된다. 아이오에스(iOS) 운영체제를 쓰는 기기 가운데 가장 크다. 기존 제품인 ‘아이패드 에어’는 9.7인치, ‘아이패드 미니’는 9.9인치였다.
대화면과 펜 입력 방식은,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혐오하던 것이다. 잡스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펜 입력 방식을 채택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월터 아이작슨 아스펜연구소 회장이 쓴 잡스의 전기를 보면, 그는 “펜이 달리는 바로 그 순간 아이패드의 생명은 다한 것”이라고 혹평하기까지 했다. 아이패드를 손가락이 아닌 보조기기로 사용하는 상황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앞서 잡스는 2007년에도 아이패드나 아이폰에 펜을 추가하자는 제안을 듣자 “웩! 누가 펜이 필요하다고 하나. 아무도 펜을 원하지 않는다”고 원색적인 거부감을 드러냈다.
또한 잡스는 생전에 아이폰 화면 크기는 한 손으로 조작할 수 있는 크기인 3.5인치, 아이패드는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이용할 수 있지만 쓰기에 부담이 없는 10인치 미만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번에 공개된 아이폰6S의 화면 크기는 4.7인치, 아이폰6S 플러스는 5.5인치로 커졌다. 둘 다 한 손으로 조작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크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큰 화면에 키보드와 스타일러스까지 딸린 것을 보면 무덤 속 잡스가 돌아누울 것”이라고 아이패드 프로의 변화상을 설명했다. 경제 잡지 <패스트 컴퍼니>도 ‘아이패드 스타일러스 장착 : 잡스의 시대는 저물었다’는 제목의 기사로 애플의 변신을 전했고, <뉴욕타임스>는 애플이 “애플 자신의 터부를 깨뜨렸다”고 평가했다. 애플의 공동창립자인 스티브 워즈니악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애플이 잡스 시절에 만들어진 도그마를 깼다”고 말했다.
하지만 애플의 이런 변화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이패드 매출이 최근 1년 반 동안 감소세를 지속하자 애플이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한 승부수로 전문직업인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신제품을 내놓았다”고 분석했다. <패스트 컴퍼니>는 “디자이너, 건축가, 사진사, 편집인 등 그래픽을 다루는 전문가에게 아이패드 프로의 스타일러스와 고해상도를 자랑하는 큰 화면이 유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애플의 이런 선택에 무덤 속의 잡스는 돌아눕겠지만, 최지성 부회장은 특유의 호탕한 어투로 “거 봐. 내 말이 맞지”라고 큰소리를 치지 않을까 싶다.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