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진(왼쪽) 엔씨소프트 사장과 김정주(오른쪽) 엔엑스씨(NXC·넥슨재팬지주회사) 대표
전문가 관전평…“헝클어진 관계 청산한 완벽한 롤플레잉”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과 김정주 엔엑스시 대표가 게임업체 창업자이자 대가답게 플레이의 진수를 보여줬다. 승부와 상관없이 전반적으로 흥미진진했고, 스테이지(국면)가 바뀔 때마다 스릴이 있었다. ‘제이제이(JJ)’(김정주의 닉게임)와 ‘티제이(TJ)’(김택진)가 플레이어라는 게 재미를 더했다.”
16일 넥슨이 엔씨소프트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고 발표하면서 막을 내린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사 사장과 김정주 엔엑스시(NXC·넥슨 지주회사) 대표 ‘자존심 대결’을 지켜봐온 게임업계 사람들의 관전평이다. 넥슨 일본법인이 김택진 사장의 엔씨소프트 지분 14.68%를 인수해 둘 사이를 어정쩡하게 만든 게 첫 스테이지라면, 16일 넥슨이 엔씨소프트 지분 전량을 매각해 그동안 한없이 꼬이고 헝클어졌던 둘 사이의 관계를 일거에 청산한 것을 마지막 스테이지라고 할 수 있는 한편의 완벽한 롤플레이게임(RPG)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넥슨은 이날 엔씨소프트 지분 전량(15.08%)을 블록딜(시간 외 대량매매) 형식으로 매각했다고 밝혔다. 주당 매각 가격은 18만3000원으로 총 매각 대금은 6051억6200만원이다. 넥슨은 엔씨소프트 지분 매각 이유에 대해 “엔씨소프트에 투자하고 3년이 지났지만 어떤 시너지도 내지 못했다. 이제 넥슨은 회수한 투자금의 자본 효율성을 높여 투자자 가치를 제고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넥슨과 엔씨소프트가 3년간 이어온 ‘동지도 아닌 적도 아니었던’ 어정쩡한 관계도 끝났다. 이날 지분 매각 발표 뒤 엔씨소프트는 “이제야 비로소 순수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써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넥슨 쪽 임원도 “더 오픈된 협력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제 남은 것은 김택진 사장과 김정주 대표 사이의 ‘앙금’을 푸는 것이다. 그동안 공방 과정에서 가족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아지면서 둘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85학번, 김 대표는 같은 대학 컴퓨터공학과 86학번이다. 두 사람 모두 당시에는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게임업체를 창업해 경쟁하고 협력하며, 회사를 세계시장을 무대로 하는 글로벌 게임업체로 키웠고, 스스로는 성공한 벤처기업가란 명성을 얻었다.
둘 사이의 게임 스테이지는 둘 모두 지금 수준으로 성공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데서 출발한다. 2012년 6월 김 사장과 김 대표는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손을 잡았다. 느닷없이 넥슨 일본법인이 김 사장의 엔씨소프트 지분 14.68%(321만8091주)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인수가는 주당 25만원으로, 8045억원이 오갔다. 다양한 억측이 난무했다. 뒤에 알려졌지만, 둘은 미국의 게임개발사 일렉트로니아츠(EA)를 인수하기 위해 지분과 현금을 바꿔 쥐기로 한 것이었다.
당시 내막을 잘 아는 한 임원은 “둘은 이에이를 인수해 글로벌 게임사로 발돋움하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작전을 짜다보니 온라인게임 ‘리니지’ 등으로 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은 김 사장이 인수자로 나서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지분만 있고 현금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넥슨 일본법인이 상장해 꽤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 사장의 지분과 넥슨 일본법인의 현금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14.68%나 넘기면서 경영권 프리미엄도 없이 시가로 넘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둘이 계획대로 이에이 인수에 성공했으면, 김 사장과 김 대표는 지금쯤 글로벌 게임 기업가로 명성을 날리고, 재산도 열배 이상 불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에이 인수는 실패했다. 이에이 창업자 출신의 이사가 마음을 바꿔 회사 매각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후 이에이는 재기에 성공했고,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문제는 졸지에 닭 쫓다 지붕 쳐다보게 된 꼴이 된 김 사장과 김 대표였다. 이에이를 인수하기 위해 바꿔잡은 ‘무기’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야 하는데, 간단치 않았다. 김 사장은 지분을 매각한 뒤 2000억원 가까운 세금을 냈다. 판 값으로 되살 수는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반면 김 대표는 최소한 산 가격은 받아야 했다. 산 가격보다 낮은 값에 되팔 경우, 넥슨 일본법인의 다른 주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했다.
되돌리는 게 쉽지 않게 되자, 둘은 애초 손잡을 취지를 살려 적극적인 협력의 길을 가기로 했다. 지분을 나눠가진 동지적 관계를 강조하며 협력을 통해 게임 개발 및 신규 사업 발굴을 가속화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속은 달랐다. 김 사장 쪽은 김 대표 쪽의 경영권 공격 가능성을 우려하며 방어자세를 취했고, 김 대표 쪽은 8045억원을 투자했는데 시너지도 못내는데다 투자를 회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 열불이 났다. 게다가 김 대표와 김 회장은 게임사업을 하는 방식이 다르고, 양쪽 회사는 기업문화가 달랐다.
그렇게 양쪽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2년 가까이 흐른 지난해 하반기 김 대표 쪽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 넥슨코리아가 엔씨소프트 지분을 추가로 인수해, 엔씨소프트 지분을 15.08%로 높인 것이다. 김 대표 쪽이 엔씨소프트 경영권 공격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자, 넥슨은 ‘단순 투자목적’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스테이지는 올해 1월27일 열렸다. 넥슨이 “엔씨소프트에 대해 경영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투자자로 변신한 것이다. 넥슨은 “지난 2년반 동안 엔씨소프트와 공동 개발 등 다양한 협업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기존 구도로는 급변하는 아이티 업계의 변화 속도에 민첩하기 대응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보다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협업을 하고자 지분 보유 목적을 변경하게 됐다”고 밝혔다.
게임을 하다 공격 기회를 잡았을 때는 자신의 희생을 일부 감수하고서라도 인정사정 없이 퍼부어야 한다. 넥슨은 엔씨소프트 쪽에 후임 혹은 추가 이사를 선임할 때 넥슨이 추천하는 인사를 뽑고,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비영업용 투자 부동산을 팔아 그 수익을 영업활동에 쓰거나 주주에게 환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현재 보유한 8.9%의 자사주는 가용성이 떨어지니 소각하고, 전자투표제를 도입해줄 것을 제안했다.
넥슨은 나아가 기업·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김택진 사장의 특수관계인이자 비등기 임원으로 재직중인 인물 가운데 연간 보수가 5억원 이상인 사람의 보수 내역과 산정 기준을 공개할 것도 요구했다. 김 사장의 부인인 윤송이 사장과 동생인 김택헌 전무를 겨냥한 것이다.
김 사장 쪽에서 보면 가족까지 타겟으로 꼽혔으니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역시 게임의 진수로 꼽힐만한 작전이 펼쳐졌다. 여론전을 벌인 것이다. 엔씨소프트는 “넥슨이 과도한 경영 간섭을 하고 있다”며 절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 대표 쪽을 선량한 게임업체의 경영권을 노리는 ‘공격자’로 설정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전략을 폈다. 이 전략은 제법 먹혀, 김 대표 쪽이 김 사장 쪽에 대한 공격 강도를 더이상 높이지 못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덕에 주총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이후 김 사장은 넷마블을 ‘백기사’로 끌어들여 김 대표 쪽의 추가 경영권 위협에 대응했다. 자사주를 넷마블에 넘기고 넷마블 지분을 갖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확고하게 하는 동시에, 넷마블을 피(지분)를 나눈 파트너로 삼아 모바일게임 기반을 강화했다. 김 대표 쪽에서 보면, 김 사장 쪽을 공격해봤자 ‘공격자’ 이미지만 강화될 뿐 얻을 게 없어진 셈이다.
승부와 상관없이 김 대표는 끝내 ‘프로’의 모습을 보였다. 게임을 끝낼 때가 됐다고 판단되자 미련없이 지르고 일어선 것이다. 세계 게임시장은 모바일 흐름을 날개삼아 크게 성장했고, 지금은 그보다 더 큰 성장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김 대표 쪽에서 보면, 김 사장 쪽과 자존심 싸움이나 하고 있을 겨를이 없어진 셈이다. 게다가 원화로 계산하면 엔씨소프트 매각가가 인수가보다 낮을 수밖에 없지만, 엔화로 계산하면 오히려 이익을 볼 수도 있게 됐다. 넥슨 일본법인 주주들에게 할 말이 있게 된 것이다.
김 사장 쪽에서 보면, 경영권 위협이 사라지면서 게입사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넥슨에 지분을 팔아 확보한 현금도 거의 그대로 갖고 있다. 넥슨이 진행한 블록딜에 참여해 회사 지분 44만주를 취득해, 회사 지분율도 11.99%로 높였다.
‘엔저’란 아이템이 김 사장과 김 대표 모두 자신이 승자라고 생각하며 게임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다.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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