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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5 04:59 수정 : 2020.01.1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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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부품·장비 136개사 실태 첫 분석

매출 1조 넘는 12곳 중 독립기업 1곳
사실상 ‘대기업 전속거래’ 묶이고
고객사 지키려니 수출 멀어져
삼성·SK·LG 등 매출 의존 심각
이들 타격 땐 산업 전체가 ‘휘청’

대부분 소모재 등 범용제품 집중
원청의 단가 인하 압력에 취약
원천기술, 자생력 구축 필수인데
국외 특허 1천개 넘는 기업 달랑 1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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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글로벌 화학소재기업 듀폰을 방문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듀폰이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감광액)를 천안 공장에서 생산하려는 뜻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성 장관이 버선발로 달려가다시피 듀폰을 찾은 이유는 이 회사가 생산하기로 한 포토레지스트가 국내 수출 1위 품목인 반도체 생산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소재는 지난해 7월 일본이 강화한 3대 수출 규제 품목 가운데 하나여서 이른 시일 안에 새 공급선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반도체는 삼성전자·에스케이(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가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포토레지스트 사례에서 보듯이 그 하부구조는 매우 취약하다.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의 생산 품목이 한정적이고 국외 기업 대비 원천기술 경쟁력이 낮아서다. 최근 일본 수출 규제 등 국제사회에 보호무역주의 바람이 거세지면서 범정부 차원에서도 국내 소부장 생태계 육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4일 <한겨레>는 반도체산업협회에 등록된 반도체 소부장 기업 136곳의 실태를 분석했다. 이들 기업의 2018년 사업·감사보고서를 분석 기본 자료로 삼았다. 그 결과 연매출 1조원이 넘는 소부장 기업은 한곳을 제외하고 재벌그룹 계열사와 글로벌 기업 한국 법인만 있었다. 재벌그룹에 속하지 않은 소부장 기업(이하 독립기업) 매출액은 대부분 1천억~2천억원 선에 집중됐다. 일단 외형에서 심각한 격차가 있는 셈이다. 이들 기업의 국외 특허 출원 실적 분석에서도 반도체 생태계의 취약한 고리가 드러났다. 매출 1조원 클럽에 든 재벌그룹 계열사들은 한곳에서만 3만개 이상 국외 특허 출원을 하고 있으나 국내 소부장 독립기업 중 30곳은 국외 특허 출원 실적이 전무했다.

이는 삼성·엘지(LG) 등 재벌 대기업을 정점으로 한 수직계열화된 생태계 속에서 독립기업이 재벌 대기업에 사실상의 전속거래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의 ‘허리’가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삼성전자 혹은 에스케이하이닉스에 비상벨이 울리면, 그 충격파가 국내 반도체 산업 전체로 파급되는 구조다.

박대영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 연구위원은 “한국 메모리반도체, 디스플레이 고객사들이 기술 유출을 이유로 핵심 기술을 2년 이상 독점계약하거나 아예 수출을 막는 경우가 잦다. 우선은 고객 개척이 급하니까 전속거래 조건을 받아들이는데 계약이 갱신될수록 국외 진출이 멀어지고 고객사에 종속된다”고 진단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전속거래 시작 초기엔 협력사 매출이 크게 뛰며 성장하지만 10년 이상 지나면 연구개발투자 비중이 줄고 단가 하락 압박을 받아 경쟁력이 후퇴한다”며 “나중에는 고객사 기술 성장 속도를 못 따라가 글로벌 기업에 밀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기업은 반도체산업협회에 가입한 136곳이다. 주력 품목 기준으로 소재 27곳, 부품 28곳, 장비 81곳으로 나뉜다. <한겨레>는 각 기업을 2018년 사업·감사보고서에 기재된 매출액 기준으로 세 집단으로 나눠 분석했다. 매출액 규모에 따라 반도체 소부장 기업의 특성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연간 매출이 1조원이 넘는 기업은 모두 12곳(1그룹), 1천억~1조원은 66곳(2그룹), 1천억원 미만 55곳(3그룹)이었다. 나머지 3곳은 경영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파악할 수 없었다. 기업 수 기준으로는 반도체 산업의 허리가 두꺼운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 비재벌 독립기업, 매출 1천억∼2천억 집중 포진

1그룹에 속한 기업은 재벌그룹 계열사거나 듀폰과 같은 글로벌 기업의 한국 법인이었다. 재벌그룹에 속하지 않은 독립기업은 1998년 삼성테크윈에서 분사한 에스에프에이뿐이다. 일본 기업 한국 법인인 도레이첨단소재(소재)·동우화인켐(소재)과 재벌그룹 및 그 계열사인 ㈜한화(소재)·세메스(장비·삼성)·삼성에스디아이(소재), 엘지화학(소재), 오씨아이(OCI·소재), 케이씨씨(KCC·소재), 효성화학(소재), 에스케이실트론(소재), 금호석유화학(소재), 에스에프에이(장비)가 1그룹에 속했다.

독립기업의 매출은 많아도 1조원을 넘지 못했다. 대부분 2~3그룹에 속했다. 연간 매출액이 5천억원 넘은 곳도 7곳에 그쳤다. 솔브레인(9630억원)·탑엔지니어링(9170억원)·동진쎄미켐(8200억원)·에이피시스템(7140억원)·원익아이피에스(6490억원)·케이씨(5260억원)·무진전자(5012억원)다. 뒤를 이어 제우스(4530억원)·이엔에프테크놀로지(4250억원)·케이씨텍(3570억원)·피에스케이홀딩스(3280억원)·디엠에스(2980억원)·이오테크닉스(2940억원)·테스(2870억원)·에스티아이(2860억원)가 독립기업 매출액 15위권에 들었고 나머지 51곳이 매출액 1천억∼2천억원대에 분포했다. 경쟁력을 갖췄다는 국내 반도체 소부장 기업 절반 가까이가 연매출 3천억원 이하로 벌어들이는 셈이다. 재벌그룹 계열사들이 1조원 넘는 매출을 독식하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 외국 기업 한국 법인 가운데선 에드워드코리아(7880억원)와 한국알박(3240억원) 등이 2그룹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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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용 제품 중심…재벌그룹 의존도 높아

독립기업 상당수는 대체 가능한 범용 제품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가격 경쟁력’이 무기인 터라 원청업체의 단가 인하 압력이나 단가 협상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범용 제품들은 장비의 전원을 켜고 끄는 부품이나 반도체 보호용 봉지, 실리콘 링 같은 소모재들이다. 중고 반도체 장비를 싼값에 사서 단순 재판매 하는 업체도 있다. 물론 반도체 제조 핵심 공정인 노광·식각·증착공정과 관련된 기업 21곳, 세정·검사장비가 20곳, 디스플레이패널 관련 장비가 16곳, 유독가스 처리나 물류자동화, 폭발방지용(방폭) 장비를 파는 기업도 7곳 있었다.

독립기업들의 재벌그룹 매출 의존도는 심각했다. 이들의 고객처는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와 엘지디스플레이에 집중됐다. 한 예로 장비기업 테스는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 쪽 매출 비중이 93%에 이르렀다. 이런 양상은 매출원을 수출과 내수로 구분해봐도 잘 드러난다. 관련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36곳 중 수출이 내수보다 많은 기업은 11곳에 그쳤다. “중국 비오이(BOE), 유텍(UTEC) 등 국외 기업에 납품하고 있다”고 밝힌 기업은 이오테크닉스·엘아이에스·쎄미시스코 등 9곳뿐이었다. 그마저도 ‘반도체·평판디스플레이’ 관련 부품, 장비에 국한됐다.

■ 국외 특허 0개인 기업도 수두룩

국내 대기업 의존도는 ‘특허 수’에서도 포착된다. <한겨레>가 의뢰해 대한변리사회가 특허집계시스템을 통해 집계한 국내 반도체 관련 기업의 국내외 특허 출원(신청) 현황을 보면 국외에 특허를 1천개 이상 출원한 상위 5곳 기업 가운데 4곳은 외국 기업 한국 법인(동우화인켐, 일본 스미토모화학 자회사)과 삼성그룹(세메스·삼성에스디아이), 엘지그룹(엘지화학) 계열사였다. 독립기업 가운데 국외 특허를 1천개 이상 신청한 곳은 동진쎄미켐 한곳에 그쳤다. 국외 출원 특허가 0개인 소부장 독립기업은 30곳에 이르렀다. 전체 분석 대상 기업 중 22%다. 독립기업들의 국외 특허 출원이 미미한 건 취약한 기술력에도 원인이 있지만 판매처가 국내 재벌 대기업에 집중되다 보니 ‘국외 특허’를 받을 유인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석을 맡은 조우제 대한변리사회 변리사는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특허 시장에서 국외 특허가 없다는 건 사실상 국외 진출 의지가 없거나,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 원천 기술이 없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글로벌’ 눈 돌리고 기술 차별화…내수 종속 생태계 ‘탈출’이 희망

“국내시장 의존, 생존하긴 쉽지만…”
국외 특허가 국내의 갑절 ‘유진테크’
고순도 불화수소 양산 ‘솔브레인’ 등
판로 다각화 성공하며 성장 기회

국내 반도체 산업이 세계 시장에 20여년간 우뚝 서는 과정에서 구축된 이런 취약한 반도체 생태계는 변화가 불가능할까. 희망을 놓기는 이르다. 이미 일부 기업에선 자발적으로 기술력을 키우며 국외 판매처로 시선을 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반도체 생태계를 면밀히 들여다봐온 전문가들도 “돌파구가 있다”고 말한다.

반도체 장비기업 유진테크는 모범 사례로 꼽힌다. 국외 특허 출원 수만 268개에 이른다. 국내 특허 출원 수(136개)보다 많다. 일찌감치 국내가 아닌 국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투자와 기술 개발을 해왔다는 방증이다. 실제 2018년까지는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가 주요 고객사였으나 지난해부터 국외 반도체 기업에도 납품을 시작했다. 이 회사 고위 임원은 1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국내 시장에만 의존하면 생존이 쉽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판단했다”며 “미국이 메모리반도체 패권이 (일본과 한국으로) 넘어간 뒤에도 세계적 수준의 소부장 기업이 여럿 존재하는 것처럼 한국 소부장 기업도 세계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수출 규제 영향으로 반도체 제조사들이 소부장 기업에 첨단 제품 개발을 의뢰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건 국내 반도체 소부장 기업엔 기회 요인이다. 솔브레인이 그 예다. 이 회사는 최근 일본 소재 기업들이 만들던 고순도 불화수소를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제조 기술은 수년 전부터 보유하고 있었지만 판로가 확실하지 않아 생산설비를 늘리지 않았던 제품이다. 일본 수출 규제로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에 공급 길이 열리면서 지난해 공장을 새로 지었다. 미국 카본이 독점공급하던 텅스텐 슬러리를 국산화한 소재 기업 유비머트리얼즈도 지난해 에스케이하이닉스 혁신기업으로 선정되면서 기술 개발 자금을 확보했고 평판도 쌓을 수 있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한국 반도체 소부장 기업 기술은 범용 제품에 집중돼 있고 핵심 기술도 미국, 일본 경쟁사에 견줘 낮다”며 “첨단 공정에서 글로벌 경쟁사와 경쟁해 따라잡기 어렵다면 차세대 기술 분야를 공략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차세대 분야는 상대적으로 연구개발할 시간이 있으니 이 분야에서 국내 반도체 제조사가 소부장 기업과 협업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가 2012년 네덜란드 에이에스엠엘(ASML), 일본 신에쓰와 협력해 반도체 초미세공정 시장을 키운 것처럼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서 국내 중견기업과 머리를 맞대라는 뜻이다.

업계에선 정부 지원이 좀더 효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반도체 중견기업의 고위 임원은 “정부가 소부장 100개 기업을 지원한다지만 내실을 갖춘 기업은 손꼽는 수준”이라며 “요즘 반도체업계 안팎으로 ‘정부 돈 못 따면 바보’라는 소문이 돈다. 형평성 논리로 나눠주다 보면 이도 저도 안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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