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재집권과 관련해 연설을 마친 뒤 퇴장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미국은 2001년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20년 만에 끝내면서, 탈레반 정권의 재등장을 목격한 채 ‘빈손’으로 퇴장했다.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를 응징하고 지정학적 완충지대인 아프간의 테러기지화를 막기 위해 침공을 감행했으나, ‘제국의 무덤’ 아프간에서 영국과 소련에 이어 역사적인 패배를 떠안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각) 아프간 정부의 붕괴가 예상보다 빨랐다고 인정하면서도 미군 철수는 옳은 결정이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4·16면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에 있는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머물던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으로 복귀해 대국민 연설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슬프다면서도 “내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며 “아프간 전쟁을 끝내기로 한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달 말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을 완전 철수해 20년 지속된 아프간 전쟁을 종식하겠다는 방침을 확고하게 재확인한 것이다. 그는 “아프간에서 우리의 임무는 (테러 대응이지) 국가 건설이 아니었다”며, 10년 전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 제거 등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또한 “나는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좋은 시기라는 것은 결코 없었다는 사실을 20년 만에 어렵게 깨달았다”며 “그게 우리가 여전히 거기에 있던 이유”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러면서 “진실은, 이것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는 것”이라고 말해, 아프간 정부 붕괴와 탈레반의 정권 재장악 속도를 예측하는 데 실패했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정보 실패나 오판에 대해 부연하지 않고, 아프간의 지도자들을 비난했다. 그는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아프간의 정치 지도자들은 포기하고 나라를 떠나 도망갔다. 아프간군 일부는 싸우려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무너졌다”며 국외로 도피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등을 비판했다.
그는 또 “내 결정이 비판받을 것을 안다”며 “그러나 이 결정을 다음 대통령에게 넘겨주기보다는 모든 비난을 내가 떠안겠다”고 말했다. “우리의 국익에 맞지 않는 분쟁에 무기한 남아서 싸우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9·11 테러 직후, 탈레반 정권에 테러 배후인 알카에다 오사마 빈라덴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해 10월 아프간 공격을 시작했다. 탈레반 정권은 두 달 만에 붕괴됐으나 조지 부시 미국 정권은 빈라덴을 찾지 못한 채 2003년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면서 아프간을 방치했다. 그사이 탈레반은 세력을 키웠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다시 아프간에 병력을 증강했다. 2011년 5월 미군 특수부대가 파키스탄에 은신해 있던 빈라덴을 사살함으로써 아프간 전쟁의 목적이 소멸됐으나, 미국 내에서 탈레반 재건 우려가 제기되면서 미군 철수의 기회를 놓쳤다.
미국은 그렇게 20년 동안 아프간에 돈과 자원을 쏟아붓고도 아프간 군과 경찰을 정예화하는 데 실패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1조달러를 들여 30만명의 아프간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면서 “우리는 그들에게 월급 등 필요한 모든 도구를 줬고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 이어 “그 미래를 위해 싸울 의지는 우리가 그들에게 제공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아프간군의 전면적 붕괴는 오랫동안 누적된 결과라고 짚었다. 백지상태의 아프간 군경을 미국 국방부의 중앙집권식 지휘체계와 복잡한 관료주의를 모델로 구축할 수 있다고 여긴 것부터가 자만이었다는 것이다. 또 아프간군은 정부에 대한 불신과 지휘부의 부패로 인해 사기가 낮다. 미국의 철군 발표 뒤 탈레반이 진격해 나갈 때 아프간군에서는 가니 정부를 위해 싸우는 게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없다는 믿음이 커졌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8일 연설에서 아프간군의 전투력에 신뢰를 표했고, 1975년 미국의 베트남전 패망 당시의 사이공 탈출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이 20년간 아프간에 머물면서 이슬람교도가 다수인데다 부족적 특징이 강한 아프간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현지 정보 파악에도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미 언론과 의회는 탈레반의 아프간 정권 재장악 속도를 예상하지 못한 바이든 정부의 ‘정보 실패’를 벼르고 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16일 백악관에서 약 20분 동안 연설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고 퇴장했다.
아프간 혼란의 책임을 물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해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보좌관을 지낸 브렛 브루언은 이날 <유에스에이 투데이> 기고에서 “함정과 문제의 가능성을 확실히 회피하면서 대통령의 목표(아프간 철군)를 달성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게 설리번의 몫인데 그런 일은 분명히 일어나지 않았다”며 경질을 주장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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