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업체 구조조정에 따라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반오바마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 ‘빅3 도시’ 가보니
자동차산업 침체 탓 실업률 미국평균 3배인 28.9%
공장 가동 느는 등 회생 기미…“일할 수 있어 행복”
자동차산업 침체 탓 실업률 미국평균 3배인 28.9%
공장 가동 느는 등 회생 기미…“일할 수 있어 행복”
지난 11일(현지시각) 디트로이트 모터쇼가 코보센터에서 화려하게 열렸다. 인근에는 제너럴모터스(GM) 본사인 70층짜리 르네상스 센터가 5개의 빌딩으로 우뚝 솟아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불과 한 두 블록만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디트로이트’가 펼쳐졌다. 황폐한 거리, 텅빈 건물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20층짜리 도심 아파트 한 채는 부서진 유리창과 군데군데 불탄 자국만이 가득했다. 노숙자들이 빈 아파트에 들어가 불을 피우다 번진 흔적들이다.
차를 타고 디트로이트의 속을 들여다보니, 호텔, 학교, 가게, 교회까지 한 마을이 모두 문을 닫은 곳도 수두룩하다. 미국의 오래된 도시 어디를 가도 빈 건물이 방치된 슬럼가가 있다. 그러나 도심의 절반 이상이 황무지로 변한 곳은 디트로이트가 거의 유일하다. 현재 디트로이트 주택의 3분의 1, 약 10만채가 비어있다. 이러니 디트로이트의 평균 주택가격은 지난 2003년 9만8000달러에서 지금은 1만5000달러다. 지난 1950년 200만명이었던 디트로이트의 인구가 이젠 91만여명으로 60년 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탓이다.
텅빈 도심 건물은 마치 ‘좀비’처럼 도심 곳곳을 갉아먹으며 진행돼 이제 디트로이트는 지엠 본사가 있는 디트로이트 강변 인근에 한움큼만 남아있다. 한때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에 이어 미국 4위의 도시였던 디트로이트는 이젠 10위권 밖 도시로 추락했다. 미국의 평균 실업률이 10%를 넘는다지만, 디트로이트의 실업률은 28.9%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안즈를 덮쳤을 당시, 뉴올리안즈의 실업률이 11%였다. 경기침체 이후 미국에선 범죄율도 낮아지는 추세지만, 디트로이트는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 범죄율이 미국 1위를 달리고, 살인사건의 70%가 미제로 남아있다. 영화 <로보캅>의 무대이기도 했던 디트로이트는 대낮에도 음산한 곳이 많다. 세계 최대의 여행가이드북 회사인 론리 프래닛이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혐오스런 도시 순위를 발표했는데 1위가 디트로이트였다.
어쩌다 ‘모터시티’ 디트로이트가 이렇게 됐는가? 헨리 포드가 지난 1903년 디트로이트 근교에 포드자동차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908년 제너럴모터스(GM), 1925년 크라이슬러가 디트로이트에 자리를 잡으면서 ‘빅3’가 완성됐다. 그리고 지난 80여년간 ‘빅3’가 세계자동차 시장을 이끌었고, 그 중심에 디트로이트가 있었다. ‘모터시티’라는 명성을 누린 디트로이트는 한때 돈과 꿈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흑인 노동자들이 디트로이트로 몰리면서 흑인문화도 빛을 발해 지금은 로스앤젤레스로 옮겨간 모타운 레코드에서 ‘잭슨 파이브’ 시절의 어린 마이클 잭슨이 음반을 취입한 곳도 디트로이트였다. 지난 1913년 세계에서 천장이 가장 높은 18층짜리 기차역으로 문을 열었으나, 지난 88년 문을 닫아 폐허가 된 디트로이트 중앙역은 ‘디트로이트의 흥망성쇠’를 상징한다.
디트로이트의 쇠락은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1967년 흑인폭동으로 백인들이 도심을 떠나면서 공동화가 시작됐고, 80년대 미국 자동차산업이 휘청이면서 공장이 문을 닫아 공동화가 더욱 가속화됐다. 디트로이트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제롬 골드버그는 “디트로이트에는 한때 지엠과 크라이슬러 공장이 각각 11개였으나, 지금은 각각 1개의 공장만이 가동되고 있다”며 “10년전 13만달러에 샀던 방 3개짜리 2층집이 지금 5000달러”라며 한탄했다. 88년 문을 닫은 디트로이트 캐딜락 공장 주변은 한때 사람들로 넘쳐났을 식료품 가게, 미장원, 유치원 등이 간판도 떼지 않은 채 시신처럼 내버려져 있다. 그 주변에 이제 중학생이나 되었을까, 10대 초반 흑인아이 너댓명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지난 금융위기 이후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의 파산신청은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 1999년 132만명이었던 자동차업체의 일자리는 지난해 절반 수준인 65만8000명으로 줄었다. 가장 큰 타격을 ‘빅3’의 본고장인 디트로이트가 입었음은 자명하다. 이제는 미국 정부 소유가 된 지엠의 전체 직원 수는 1979년 85만3000명에서 이제는 23만50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1999년 5월 69달러였던 지엠의 주가는 지난해 5월 파산신청 직전, 75센트였다. 지난 2001년 지엠이 후원했던 PGA골프 대회는 5개에 이르렀으나, 이젠 하나도 없다. 디트로이트 지역에서 자동차 회사에 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앨러배마, 조지아, 텍사스 등 자동차 생산이 그나마 이어지는 남부 지역으로 이직했다.
캐스코더 구역에서 햄버거 등 먹을 것을 홈리스 등에게 나눠주던 욘치 차이코프스키는 “2년 반 전부터 교회에서 이 일을 해왔는데, 최근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디트로이트의 밤은 엠지엠(MGM) 등 3개의 거대한 카지노가 불을 밝히고 있다. 카지노에는 직장이 없는 시민들이 하루 온종일 슬롯머신을 당기기도 한다. 디트로이트에는 미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1센트짜리 슬롯머신이 있다.
가장 사정이 낫다는 포드도 최근 미국내 공장 근로자 4만1000명을 대상으로 자발적 특별퇴직안을 제시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포드 본사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이미 사무실이 텅 비어 빈 자리가 많다. 내 밑에 4~6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이젠 다 나가고 팀장인 나 혼자 남았다. 팀원은 인도에 있다”고 말했다. 임금이 싼 곳을 찾아 아웃소싱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디트로이트에 최근 ‘회생’의 기미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11일 오후 3시께 크라이슬러의 닷지 램과 닷지 다코다 등 픽업 트럭을 생산하는 워렌 트럭 공장에 한 무리의 직원들이 공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공장은 한 달만에 문을 열었다. 이 공장에서 10년간 근무했다는 펠 홍키(33)는 “오늘 2교대로 문을 열어 한 달만에 출근한다. 2교대 근무는 9달만이다”라며 “비록 임금은 깎였지만, 일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날 공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이 공장은 한때 2700명의 노동자가 하루 3교대로 근무했지만, 지난해 2월 2교대, 지난 4월 1교대로 줄었다. 그리고 5월 이후로는 문을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했고, 지난 연말연시에도 한 달동안 공장이 문을 닫았다. 금융위기 이전 한때 의료보험과 은퇴자 연금을 합쳐 시간당 80달러였던 자동차업체 생산라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이제 24달러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지난해 ‘빅3’의 자동차생산은 47년만의 최저 수준이었고, 12만6000개의 일자리가 쓸려갔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저널>은 최근 “자동차 회사들이 일자리를 늘리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지엠은 지난해 18일 정부로부터 받은 할부금융 차입금에 대해 첫 부분상환을 시작했다. 코메리카 은행의 추도현 선임 디렉터는 “최근부터 자영업자들을 대상으로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 경기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 40년간 살았다는 메리어트 호텔 매니저인 마리아 위트는 “요즘 디트로이트는 오히려 활기를 띄고 있다고 봐야한다”며 “디트로이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호텔 손님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인 주간신문인 <주간 미시간> 발행인인 김택용 미시간주 주지사 자문위원도 “지난해 말 ‘바닥을 쳤다’고 본다. 이후 조금씩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며 “디트로이트는 그 상징성 때문에라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디트로이트 살리기’에 힘을 쏟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연방정부의 투자가 디트로이트에 집중되고 있고, 기업유치를 위한 세제 혜택도 적극 지원되고 있다. 문닫은 자동차 공장에 연료전지 등 다른 업종의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또 버려진 빌딩이나 공터에 야채, 과일 등을 재배하는 도시형 농업이 디트로이트의 새로운 산업으로 움트고 있고, 영화, 패션 등 자동차 이외 분야의 업종에도 뒤늦게 눈을 뜨고 있다. 데이브 빙 디트로이트 시장은 “디트로이트의 인구감소가 중단되고 있다. 그러나 중간 크기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선 상업용 농장, 연료전지 산업 등 다양한 업종에서 일자리가 창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디트로이트 살리기’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빙 시장도 ‘디트로이트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엠의 빌딩 앞에는 8개의 미국 성조기가 펄럭인다. 지엠이 정부 보조금을 받아 정부 소유가 되기 전에는 성조기와 지엠 깃발이 4개씩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성조기로 채워졌다. 지엠은 다시 예전처럼 지엠의 깃발이 지엠 빌딩 앞에서 흩날릴 날을 기대하고 있다.
모터쇼가 열리는 코보홀에는 1930~40년대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디트로이트 출신의 조 루이스 동상이 서있다.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 기록인 25차 방어(이중 23차례 KO승)에 성공하고 더이상 도전자를 찾지 못해 은퇴했던 불세출의 챔피언이다. 조 루이스의 고향 디트로이트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진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디트로이트의 부활을 바라는 이들이 많다.
디트로이트/글·사진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디트로이트 인구 추이·미국 자동차산업 일자리
지난 연말부터 연초까지 한 달 이상 가동이 중단됐던 크라이슬러 공장이 지난 11일부터 재가동해, 오후 근무 직원들이 출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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