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이니아주 지부 문서 탈취
킹 목사 자결 협박 편지 등 폭로
‘8인조’ 가운데 5명 신원 공개
“민주주의 건강성에 도움 되길”
킹 목사 자결 협박 편지 등 폭로
‘8인조’ 가운데 5명 신원 공개
“민주주의 건강성에 도움 되길”
1971년 3월8일 미국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세기의 승부’가 펼쳐졌다. ‘도전자’는 없었다. 31승 무패의 무함마드 알리는 1967년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로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했다. 26승 무패의 조 프레이저는 알리의 부재 속에 세계 헤비급 권투계를 평정했다. ‘챔피언 알리’ 대 ‘챔피언 프레이저’의 첫 맞대결, 15회까지 이어진 이날 경기는 프레이저의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끝났다.
세계가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든 그날 밤, 미 펜실베이니아주 델라웨어 카운티의 미디어 지역 연방수사국(FBI) 지부 앞으로 8명의 젊은이가 모여들었다. 당시 미국 사회를 뒤흔든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앞장선 ‘운동권’들이다. 망설임없이 잠긴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보관돼있던 모든 문서를 이삿짐을 나르듯 들고 나왔다.
그로부터 2주 뒤, <워싱턴포스트>는 FBI가 평화·인권운동가를 포함해 장기간에 걸쳐 무차별적 민간인 사찰을 벌여온 사실을 폭로했다. 이른바 ‘FBI 시민감시단’이란 이름으로 ‘8인조 절도단’이 제보한 내용이 뼈대였다. 당시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보도를 막으려고 “도난당한 정부 문서를 돌려달라”며 신문사 경영진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폭로는 줄을 이었다.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도 잇따라 관련 사실을 보도했다. 이른바 ‘코인텔프로’(카운터인텔리전스 프로그램)란 암호명으로 사찰의 범위를 넘어 시민단체의 활동에 적극 ‘개입’한 증거까지 발견됐다. FBI 요원이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외도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며 자살을 종용한 편지까지 공개됐다.
파장이 커지자, 에드거 후버 당시 FBI 국장은 200여명의 요원을 투입해 ‘8인조’의 행방을 추적했다. 하지만 끝내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수사는 사건 발생 5년 뒤인 1976년 3월 절도죄 공소시효가 지나 자동 종결됐다. ‘8인조 절도단’은 끝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이듬해, 이번엔 정보기관이 ‘절도단’으로 나섰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다. 닉슨 대통령은 결국 1974년 사임했고, 미 의회는 1975년 민주당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처치 위원회)를 구성해, 정보기관 개혁에 착수했다. 1978년 10월 정보기관의 국내 첩보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해외 정보 감시법’(FISA)이 제정된 것이 그 결과다.
사건 발생 뒤 43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당시 FBI의 무차별적 민간인 사찰 실태를 첫 보도한 베티 메츠저 전 <워싱턴포스트> 기자의 설득 끝에 ‘8인조’ 가운데 5명이 ‘커밍아웃’에 나섰다. 메츠저 기자는 이들의 ‘활약상’을 담은 책 출간을 앞두고 있단다.
<뉴욕타임스> 등은 7일 이들의 사연을 전하며 “국가안보국(NSA)의 광범위한 사찰 활동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막대한 정보를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내려받은 것과 달리, ‘8인조’는 장갑을 끼고 사무실에 침입해 종이문서를 가방에 담았다. 그들은 스노든의 선구자격”이라고 짚었다. 말하자면 ‘아날로그판 스노든’이라는거다.
당시 ‘거사’에서 ‘자물쇠 따기’를 맡은 키스 포사이스(63)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정부가 또다시 시민을 상대로 무차별적 사찰을 벌이고, 의회에 거짓말을 해대고 있다.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지켜내는 데 필수적인 사회적 토론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려고 신원을 공개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부인과 함께 사건에 가담한 템플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출신 존 레인스(80)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해야 할 일을 했는데, 관심을 끌 이유가 없었다”며 “스노든은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내부고발자이며,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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