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자간 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티피피) 탈퇴와 ‘일대일’ 양자 협상으로의 무역·통상 전략 선회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세계가 ‘무역 전쟁’ 파고에 휩싸일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가 23일(현지시각) 제시한 무역·통상 기본 틀은 상당히 공세적이다. ‘미국민의 이익에 기여하는 공정한 무역’을 기본 원칙으로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접근법으로 ‘일대일’ 협상, 즉 양자 협정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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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왜 일대일 협상 외치나? ‘공정한 무역’이란, 양국이 대체적인 균형점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상호주의를 일컫는다. 하지만 미국이 과거 자국법인 ‘슈퍼 301조’로 무역 상대국에 보복 조처를 해온 것에서 알 수 있듯, 공정성의 잣대는 고무줄이고 힘의 논리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외쳐온 점에 견줘 보면, 더욱더 일방적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은 ‘일대일’ 협상은 다른 국가들에 대한 약탈적이고 공격적인 개방 요구로 이어질 수 있다. 양자 협상은 다자 협상에 비해 별도의 견제장치 없이, 힘과 협상 수단의 우위를 바탕으로 강대국의 국익을 관철하기 쉬운 구도이기 때문이다.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도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아시아든 중동이든 세계시장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확대하겠다”며 공세적인 중상주의를 예고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런 기조는 당장 중국과 일대일로 맞붙을 때 강한 무역·통상 파열음을 예고한다. 지금 같은 속도전이라면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취임 100일 계획’에 나와 있는 대로 중국을 대상으로 ‘불공정 무역 사례’를 들이대며 고율 관세를 부과하거나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게다가 무역 협상이 거칠어지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군사적 압박 수단까지 동원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중국도 보유중인 미국 국채를 매도하거나 미국 기업의 물건 구입을 거부하는 등 반격 수단이 적지 않아, 자칫 ‘미-중 치킨 게임’ 양상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트럼프는 최근 들어선 주로 ‘중국, 멕시코’ 외에 한국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선거기간 동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 “미국 일자리를 죽인다”고 비난해온 점에 비춰볼 때, 한국도 한-미 에프티에이 재협상 요구 등 상당한 압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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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P, 폐기 수순 밟나? 미국의 탈퇴로 미국·일본 등 12개 국가가 참여해 2015년 10월 타결된 티피피는 사실상 폐기될 처지에 놓였다. 세계 1, 3위 경제대국인 미국과 일본이 주도한 티피피는 발효되면 전체 참여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40%에 이르고, 유럽연합(EU) 경제 규모의 1.5배나 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협정이었다. 하지만 티피피 참가국 전체 국내총생산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이 빠지면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미국이 빠지더라도 중국 등 다른 나라에도 티피피 문호를 개방하는 방식으로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실성이 높지 않다. 그동안 티피피를 아베노믹스 핵심으로 강조하며 안간힘을 써온 일본 정부도 애써 충격을 감추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4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도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이 협정이 갖는 전략적, 경제적 의미에 대해 침착하게 이해를 요구해 가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티피피 탈퇴로 중국이 주도하는 또 다른 다자간 무역협정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아르셉)이 탄력을 받을지에 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시엔엔>(CNN)은 “(티피피 무산으로 인한) 공백은 채워질 것”이라며 티피피와 거꾸로 미국을 배제한 다자무역협정이 추진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반면, 티피피가 지지부진하면 중국도 무리하게 블록화를 추진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워싱턴 도쿄 베이징/이용인 길윤형 김외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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