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0일 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칠레에 도착하기 전 선내에서 칠레 현대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그의 정권을 군사쿠테타로 무너뜨리고 철권통치를 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시대가 사진과 함께 게시돼 있다. 피스보트/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현장속 현장/칠레 아옌데 대통령 경호원의 증언
그와 처음 악수를 나눴을 때 악력이 보통이 아님을 직감했다. 환갑을 넘긴 나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칠레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온몸으로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그가 들려준 인생역정은 쉽게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드라마적 요소가 너무 강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되풀이 해 확인할 때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똑같은 대답을 또박또박 반복했다. 브루노 세라노(63·이하 브루노)와의 인터뷰는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1973년 9월11일 브루노는 이른 새벽 눈을 떴다.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라디오를 켜자 심상찮은 뉴스가 흘러 나왔다. 발파라이소 지역에서 군이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대통령의 친구들’(GAP)로 불린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경호팀의 일원이었던 그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날 아침 6시께 아옌데 대통령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쿠데타가 시작됐으며, 반란군의 목적지는 수도 산티아고가 될 것이라는 보고였다. 7시30분께 대통령궁(모네다)에 도착한 아옌데 대통령은 20명의 경호원과 너댓명의 각료 등에 둘러싸인 채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8시께 그의 두 딸과 비서진이 대통령궁으로 합류했다. 이 때 쿠데타군은 이미 발파라이소를 출발해 산티아고로 향하고 있었다. 대통령궁 방어를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주한 군은 넓은 광장이 있는 대통령궁 남쪽과 북쪽 두 방향으로 병력을 분산 배치시켰다. 오전 9시께 대통령궁을 겨냥한 첫 총성이 울렸다. 외곽 경비를 맡았던 경찰과 군 요원들은 줄행랑을 친 지 오래였다. 이어 대통령궁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가족과 함께 안전한 망명을 보장할 테니 투항하라는 제안이었다. 한마디로 이를 거부한 아옌데 대통령은 주변을 둘러봤다. 대통령궁 북쪽 끝자락 2층에 자리한 집무실 안에는 경호원 20명과 경찰병력 18명, 두 딸을 포함한 5명의 여성과 각료·비서진 등 8~10명이 모여 있었다.
“일 때문에 남부지방에 내려갔다가 전날 밤에야 산티아고로 귀환했다. 쿠데타임을 직감하긴 했지만,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 집에 잠깐 들렀다가 복귀해도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날 브루노가 트럭을 얻어 타고 대통령궁 부근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께. 막 총격전이 시작된 직후였다. 군인들의 눈을 피해 걸어서 대통령궁 쪽으로 다가가면서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건물 옥상마다 저격병이 배치돼 있었고, 탱크와 군 병력을 가득 실은 트럭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대통령궁 동쪽 건물에선 경호팀 동료 몇 명이 소총으로 탱크와 맞서고 있었다. 더 이상 접근이 불가능했다.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주변 건물 2층으로 올라간 그는 권총을 꺼내 들었다.
여성 내보낼 때도 계속된 총격
“싸울 수 없는 사람은 이곳에서 나가라.” 군의 공세가 불을 뿜으면서 아옌데 대통령은 여성들에게 대피명령을 내렸다. 두 딸은 남겠다고 고집했지만, 그의 완강한 설득에 밀려 결국 눈물로 작별을 고했다. 여성들을 내보낸다고 군쪽에 연락을 했지만, 그들이 대피하는 동안에도 남쪽 알라메라 거리 쪽에서 발포는 계속됐다. 2시간 가량 이어지던 무차별 총질은 오전 11시께 갑자기 멈췄다. 긴장된 정적이 흐른 것도 잠시, 대통령궁 북쪽에서 2대의 전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궁에서 하루이틀만 저항을 이어가도, 전면적인 민중항쟁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대통령궁 폭격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현장에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저공비행으로 날아온 ‘미국산 전투기는 대통령궁 북쪽 들머리에 ‘미국산 폭탄’을 떨어뜨렸다. 굉음과 함께 대통령궁이 화염과 연기에 휩싸였다. 안에 남아있던 이들이 대통령궁 2층 중간지대로 이동해 방독면을 착용하고 최종 방어선을 구축하는 사이, 군 병력이 대통령궁 진입작전에 들어갔다. “삽시간에 건물 1층을 장악한 군은 2층 공략을 시작했다. ‘닥터 아옌데’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더 이상 죽지 말라고 권유했다. 쿠데타 군이 제네바 협약에 따라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들에게 포로 대우를 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총을 내려놓고 1층으로 내려간 이들은 군화 발과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폭행을 당한 뒤 어디론가 끌려갔다. 오후 2시~2시30분께 상황이 종료됐다. 이날 모데다에서 숨진 사람은 아옌데 대통령과 ‘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국정방송 <채널 7>의 기자 에르네스토 올리바레스 등 두 사람 뿐이다. 올리바레스는 아옌데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당시 군부는 아옌데 대통령이 자살을 했다고 발표했고, 지난 1990년 실시된 검시 결과도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브루노는 ‘닥터 아옌데’의 자살을 믿지 않았다. “자살하는 데 사용됐다고 발표한 소총은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선물한 것이다. ‘닥터 아옌데’에게 군을 장악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실패한 뒤 호신용으로 준 것이다. 총신이 길기 때문에 자살에 사용하기 어려운 총이다. 자살이라면 군부가 책임질 필요가 없지만, 만약 쿠데타군이 대통령을 암살했다면 대단히 심각한 사건이다. 비밀리에 진행된 검시 결과를 믿기도 어렵지만, 주검에 여기저기 총상을 입은 건 지금껏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날 브루노는 대통령궁에 군이 진입하는 걸 확인한 뒤 오후 1시께 대통령 근처를 빠져 나왔다. 대통령궁 동쪽 건물에서 산발적인 저항을 하던 동료도 주차장을 통해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궁 안에서 끝까지 저항했던 20명의 경호팀 동료 가운데 2명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흘 뒤 돌연 총살에 처해졌다. 나머지 18명은 군부대에 구금됐는데, 이 가운데 ‘엘라디오’와 ‘치코 세르히오’ 등 2명은 다른 죄수들과 뒤섞여 탈출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쿠데타 당시 대통령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나머지 동료 16명은 모두 총살됐다. 군부는 이들의 주검에 수류탄을 던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오랜 세월 ‘실종’으로 처리돼있었다.” 30여년 전의 일을 담담하게 얘기하던 그의 눈에서 굶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처음엔 울 줄도 몰랐고, 울 수도 없었다”며 “나중에야 우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당시 95명의 ‘대통령의 친구들’ 가운데 살아남은 23명은 요즘도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어 스러져간 동지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한편, 이날 현장을 탈출한 브루노는 산티아고 남쪽 공단 밀집지역인 코르도네스 인더스트리아로 달려갔다. 그곳 노동자들에게 쿠데타의 전모를 알리고 저항군을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장도 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중무장한 군인들과 맞설 수는 없었다. 그날 밤 공단에서 방어선을 조직하며 밤을 지샌 그와 동료들은 다음 날 아침 8시께 총질을 해대며 밀고 들어온 군에 모두 체포됐다. 무차별 구타를 당한 뒤 군용트럭에 태워진 브루노 일행은 시내 칠레 경기장으로 옮겨졌다. 끌려가는 사이 마주친 산티아고 시내는 공포로 얼어 붙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군화 발에 짓이겨지고 있었고, 대통령궁 주변에선 여전히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생지옥’으로 변한 경기장 “이미 5천명 이상이 끌려와 있었다. 대표적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붙들려와 있었다. 대학시절 연극을 부전공하면서 강의를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하라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다가가 말을 걸어봤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상처 투성이인 채로 대단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이튿날 그곳에서 총살 당했다.” 경기장 안쪽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체포돼 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스탠드 뿐 아니라 운동장 안에까지 연행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브루노는 나흘 뒤 더 넓은 국립 경기장으로 옮겨졌다. 그가 도착할 무렵 이미 3만5천~4만 명 가량이 구금돼 있었다. 그곳에서 고문은 더욱 정도를 더해갔다. 차츰 몸과 마음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점점 의식이 혼미해져 갔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의식을 잃은 채 떨고 있으니 보다 못한 주변 사람들이 어디서 나무 판자를 구해다 나를 그 위에 누이려 했다.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려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관에 넣으려는 줄 알고 ‘나 아직 안 죽었다’고 내가 발버둥을 쳤다고 하더라.” 며칠 뒤 적십자사 의료진이 현장에 도착했다. 한동안 씻지도 못한 상황이라 냄새가 심했는지 의사는 코를 틀어 막고 그의 몸 상태를 살폈다. 급성 폐렴이었다. 경기장 안 진료소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은 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선 아옌데 정권에서 일했던 인물로 보이는 ‘변절자’가 종이봉투로 얼굴을 가린 채 눈만 내놓고 ‘요주의 인물’들을 군인들에게 찍어 주고 있었다. 브루노는 국립경기장을 ‘죽음의 대학’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삶의 극단을 맛봤고, 죽음의 문턱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지옥 같던 그의 국립경기장 생활은 체포된 지 3개월 여 만인 그 해 11월16일 극적으로 끝을 맺게 된다. “우연한 기회였다. 당시 군부는 경기장 스탠드를 구역별로 나누어 체포한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하루는 펜스 넘어 옆 구역에서 20여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더라. 무슨 일 있느냐고 물으니, 통금 위반으로 붙잡혀온 사람들인데 오늘 나간다고 말했다.” 생각하고 말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펜스를 뛰어 넘었다. 멀리서 군인들이 잡담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통금 위반자들과 뒤섞여 운동장으로 내려섰다. 심문대로 가는 사이 ‘당신 때문에 우리까지 위험해지면 어떻게 할 테냐’고 눈을 부라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뒤였다. 심문대에선 산더미 같이 서류를 쌓아 놓은 채 장교 1명이 눈이 벌건 채 앉아 있었다. “컴퓨터가 있는 시대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게다. 쏟아져 들어오는 연행자에 대한 기록을 따로 관리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사람들을 일일이 심문해 확인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 차례가 돼 정치성향을 묻길래 ‘정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둘러댔다. 석 달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수염까지 기르고 있었으니, 꼴이 우스웠던 지 순순히 내보내줬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버티며 경기장 밖으로 나오니, 실종된 가족과 친구를 찾는 인파가 북적대고 있었다. 브루노를 붙잡고 경기장 안의 상황을 묻거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 본 일이 있느냐’고 매달리는 사람들 때문에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통행금지가 두어 시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시 붙잡힐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한 덩치 큰 남자가 ‘도와 주겠다’며 갑자기 그의 팔을 억세게 잡아 당긴 것은 그 때였다. 사복 경찰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저항할 힘도, 그럴 겨를도 없었다. 자칫 다시 붙들려가 더 큰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 채 그가 이끄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에 무작정 ‘남쪽으로 간다’고 말했다. 자기도 남쪽으로 간다며 계속 말을 걸었다. 경기장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고 묻기에 ‘모든 게 좋았다’고 말했다.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느냐고 묻기에 ‘그런 일 없었다’고 말했다. 매를 맞지도 않았고, 밥도 잘 챙겨주더라고 말했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다. 온 몸의 힘을 모아 차를 박차고 도망을 치려는 데, 기력이 없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뒤쫓아 온 그 남자가 ‘몸 조심하라’며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고 가더라.” 한참을 걸어 친구 집에 도착한 그는 현관문을 두드린 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들 3개월 전에 이미 그가 죽은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면도를 하고, 목욕도 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따뜻하게 차려진 음식도 배불리 먹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이미 3개월 동안 딱딱한 바닥에서 생활해 온 터라 침대가 불편하게 느껴진 탓이다. 건강을 회복한 브루노는 동지들의 행방을 찾는 데 골몰했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투옥됐거나 이미 숨졌고, 더러는 망명을 떠난 뒤였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 지 파악하기 때까지는 6개월 가까이가 걸려야 했다. 이후 그는 혁명좌파운동(MIR)의 지하 조직원으로 반독재 투쟁을 이어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82년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제10구역 산악지대 넬투메에서 게릴라 조직 재건작업이 군부에 노출돼 20여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탄압의 광풍이 불면서 조직은 와해 위기에 처했고, 브루노는 다시 몸을 엎드리고 숨어 지내야 했다. 조직생활을 접은 그는 도시빈민 지원활동에 눈을 돌렸고, 지난 2000년부터는 원주민 인권운동에 전력하고 있다. “1973년 쿠데타가 나기 직전 남부지방에 갔던 이유는 당시 혁명좌파운동이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군부의 반발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 무장력을 갖추고 쿠데타에 대비해야 한다고 본 탓이다. 상당수 조직원들이 쿠바를 방문해 게릴라 훈련을 받았고, 나도 1972년 6개월 동안 쿠바에 머물며 산악 전투훈련을 받았다.” 혁명을 꿈꾸며 총을 들고 게릴라 훈련을 하던 시절 그는 친구들과 한가지 약속을 했다고 했다. 누군가 먼저 죽거든 첫 아이에게 그 친구의 이름을 물려 주자는 다짐이었다. 브루노는 첫 딸의 이름을 20대 초반에 숨진 친구 ‘클라우디오’의 이름을 따 클라우디아(29)로 지었다. 쿠바에서 영화를 전공한 뒤 현재 멕시코에서 영화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클라우디아가 지난 2003년 완성한 첫 작품의 제목은 <붉은 식탁보>였다. “쿠데타 직후 칠레 남부 산악지대를 헤메던 클라우디오는 한 농가에서 음식물을 구할 수 있었다. 친절한 농부는 꼭 다시 오라고 권했다. 클라우디오와 동료들은 농부의 말을 믿고 며칠 뒤 그 농가를 다시 찾아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몰살 당했다. 그때 농부는 게릴라가 왔다는 표시로 창가에 붉은 색 식탁보를 걸어 놓았다.” 낡은 흑백사진속엔 동지들의 흔적만이 인터뷰가 끝날 무렵 브루노는 낡은 흑색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아옌데 부부와 함께 한 때 브루노와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했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양복 저고리 단추를 푼 채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 맨 앞에서 걷고 있는 맥스 마라비오는 취임 당시 아옌데의 경호 책임자였다. 하지만 군부의 유혹에 넘어가 검은 이권을 챙긴 그는 쿠데타가 나기 전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마라비오 곁에 선 이는 마리오 멜라다. 군 출신으로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강제 예편 당한 그는 경호팀 ‘대통령의 친구들’의 조직체계를 세운 인물이다. 마지막까지 대통령궁을 지켰던 그는 쿠데타 직후 처형됐다. 아옌데 부부의 뒤에서 젊은 브루노가 앳된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한 채 걷고 있다. 그의 동지이자 ‘브루노’란 가명을 썼던 세르지오 블랑코 타레즈가 그 뒤에서 걷고 있다. 타레즈는 쿠데타가 났을 당시 경호팀 책임자을 맡고 있었고, 역시 쿠데타 직후 총살됐다. 사진을 보며 웃고 있는 브루노의 눈가에 다시 붉어졌다. 과학적 확증을 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바다의 해류가 바뀔 때, 그러니까 두 해류가 만날 때 바다에 모종의 변화가 있는 것 같다. 한가지 해류를 따라 갈 때는 파도가 없는 날에도 수평선을 바라보면 바다의 결이 느껴진다. 잔잔한 바다에 삐죽삐죽 잔 물결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연신 고개를 내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해류가 섞이는 지점에선 바다가 온통 점액질로 변해버리는 느낌이다. 파도가 제법 있는 날도 바다는 파열음을 내지 않고 움직임이 융단처럼 부드럽다. 부드럽다고 해서 거세지 않은 것은 아니니 흔들림이야 심하게 느껴지지만, 바다가 온통 한 몸이란 생각이 들 지경이다. 칠레를 출발한 이튿날에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가 변하고 있었다. 두 해류는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게 하나로 뒤엉켜 파도를 완만한 곡선으로 만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하루 이틀 간격으로 그러기를 두어 차례, 갑판에서 내려다 보니 옅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물빛이 낯익다. 카리브해에 다가선 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짙은 코발트 빛 바다가 반가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브루노 세라노
“싸울 수 없는 사람은 이곳에서 나가라.” 군의 공세가 불을 뿜으면서 아옌데 대통령은 여성들에게 대피명령을 내렸다. 두 딸은 남겠다고 고집했지만, 그의 완강한 설득에 밀려 결국 눈물로 작별을 고했다. 여성들을 내보낸다고 군쪽에 연락을 했지만, 그들이 대피하는 동안에도 남쪽 알라메라 거리 쪽에서 발포는 계속됐다. 2시간 가량 이어지던 무차별 총질은 오전 11시께 갑자기 멈췄다. 긴장된 정적이 흐른 것도 잠시, 대통령궁 북쪽에서 2대의 전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궁에서 하루이틀만 저항을 이어가도, 전면적인 민중항쟁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대통령궁 폭격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현장에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저공비행으로 날아온 ‘미국산 전투기는 대통령궁 북쪽 들머리에 ‘미국산 폭탄’을 떨어뜨렸다. 굉음과 함께 대통령궁이 화염과 연기에 휩싸였다. 안에 남아있던 이들이 대통령궁 2층 중간지대로 이동해 방독면을 착용하고 최종 방어선을 구축하는 사이, 군 병력이 대통령궁 진입작전에 들어갔다. “삽시간에 건물 1층을 장악한 군은 2층 공략을 시작했다. ‘닥터 아옌데’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더 이상 죽지 말라고 권유했다. 쿠데타 군이 제네바 협약에 따라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들에게 포로 대우를 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총을 내려놓고 1층으로 내려간 이들은 군화 발과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폭행을 당한 뒤 어디론가 끌려갔다. 오후 2시~2시30분께 상황이 종료됐다. 이날 모데다에서 숨진 사람은 아옌데 대통령과 ‘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국정방송 <채널 7>의 기자 에르네스토 올리바레스 등 두 사람 뿐이다. 올리바레스는 아옌데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당시 군부는 아옌데 대통령이 자살을 했다고 발표했고, 지난 1990년 실시된 검시 결과도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브루노는 ‘닥터 아옌데’의 자살을 믿지 않았다. “자살하는 데 사용됐다고 발표한 소총은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선물한 것이다. ‘닥터 아옌데’에게 군을 장악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실패한 뒤 호신용으로 준 것이다. 총신이 길기 때문에 자살에 사용하기 어려운 총이다. 자살이라면 군부가 책임질 필요가 없지만, 만약 쿠데타군이 대통령을 암살했다면 대단히 심각한 사건이다. 비밀리에 진행된 검시 결과를 믿기도 어렵지만, 주검에 여기저기 총상을 입은 건 지금껏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날 브루노는 대통령궁에 군이 진입하는 걸 확인한 뒤 오후 1시께 대통령 근처를 빠져 나왔다. 대통령궁 동쪽 건물에서 산발적인 저항을 하던 동료도 주차장을 통해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궁 안에서 끝까지 저항했던 20명의 경호팀 동료 가운데 2명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흘 뒤 돌연 총살에 처해졌다. 나머지 18명은 군부대에 구금됐는데, 이 가운데 ‘엘라디오’와 ‘치코 세르히오’ 등 2명은 다른 죄수들과 뒤섞여 탈출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쿠데타 당시 대통령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나머지 동료 16명은 모두 총살됐다. 군부는 이들의 주검에 수류탄을 던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오랜 세월 ‘실종’으로 처리돼있었다.” 30여년 전의 일을 담담하게 얘기하던 그의 눈에서 굶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처음엔 울 줄도 몰랐고, 울 수도 없었다”며 “나중에야 우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당시 95명의 ‘대통령의 친구들’ 가운데 살아남은 23명은 요즘도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어 스러져간 동지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한편, 이날 현장을 탈출한 브루노는 산티아고 남쪽 공단 밀집지역인 코르도네스 인더스트리아로 달려갔다. 그곳 노동자들에게 쿠데타의 전모를 알리고 저항군을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장도 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중무장한 군인들과 맞설 수는 없었다. 그날 밤 공단에서 방어선을 조직하며 밤을 지샌 그와 동료들은 다음 날 아침 8시께 총질을 해대며 밀고 들어온 군에 모두 체포됐다. 무차별 구타를 당한 뒤 군용트럭에 태워진 브루노 일행은 시내 칠레 경기장으로 옮겨졌다. 끌려가는 사이 마주친 산티아고 시내는 공포로 얼어 붙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군화 발에 짓이겨지고 있었고, 대통령궁 주변에선 여전히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생지옥’으로 변한 경기장 “이미 5천명 이상이 끌려와 있었다. 대표적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붙들려와 있었다. 대학시절 연극을 부전공하면서 강의를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하라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다가가 말을 걸어봤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상처 투성이인 채로 대단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이튿날 그곳에서 총살 당했다.” 경기장 안쪽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체포돼 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스탠드 뿐 아니라 운동장 안에까지 연행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브루노는 나흘 뒤 더 넓은 국립 경기장으로 옮겨졌다. 그가 도착할 무렵 이미 3만5천~4만 명 가량이 구금돼 있었다. 그곳에서 고문은 더욱 정도를 더해갔다. 차츰 몸과 마음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점점 의식이 혼미해져 갔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의식을 잃은 채 떨고 있으니 보다 못한 주변 사람들이 어디서 나무 판자를 구해다 나를 그 위에 누이려 했다.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려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관에 넣으려는 줄 알고 ‘나 아직 안 죽었다’고 내가 발버둥을 쳤다고 하더라.” 며칠 뒤 적십자사 의료진이 현장에 도착했다. 한동안 씻지도 못한 상황이라 냄새가 심했는지 의사는 코를 틀어 막고 그의 몸 상태를 살폈다. 급성 폐렴이었다. 경기장 안 진료소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은 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선 아옌데 정권에서 일했던 인물로 보이는 ‘변절자’가 종이봉투로 얼굴을 가린 채 눈만 내놓고 ‘요주의 인물’들을 군인들에게 찍어 주고 있었다. 브루노는 국립경기장을 ‘죽음의 대학’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삶의 극단을 맛봤고, 죽음의 문턱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지옥 같던 그의 국립경기장 생활은 체포된 지 3개월 여 만인 그 해 11월16일 극적으로 끝을 맺게 된다. “우연한 기회였다. 당시 군부는 경기장 스탠드를 구역별로 나누어 체포한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하루는 펜스 넘어 옆 구역에서 20여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더라. 무슨 일 있느냐고 물으니, 통금 위반으로 붙잡혀온 사람들인데 오늘 나간다고 말했다.” 생각하고 말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펜스를 뛰어 넘었다. 멀리서 군인들이 잡담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통금 위반자들과 뒤섞여 운동장으로 내려섰다. 심문대로 가는 사이 ‘당신 때문에 우리까지 위험해지면 어떻게 할 테냐’고 눈을 부라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뒤였다. 심문대에선 산더미 같이 서류를 쌓아 놓은 채 장교 1명이 눈이 벌건 채 앉아 있었다. “컴퓨터가 있는 시대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게다. 쏟아져 들어오는 연행자에 대한 기록을 따로 관리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사람들을 일일이 심문해 확인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 차례가 돼 정치성향을 묻길래 ‘정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둘러댔다. 석 달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수염까지 기르고 있었으니, 꼴이 우스웠던 지 순순히 내보내줬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버티며 경기장 밖으로 나오니, 실종된 가족과 친구를 찾는 인파가 북적대고 있었다. 브루노를 붙잡고 경기장 안의 상황을 묻거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 본 일이 있느냐’고 매달리는 사람들 때문에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통행금지가 두어 시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시 붙잡힐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한 덩치 큰 남자가 ‘도와 주겠다’며 갑자기 그의 팔을 억세게 잡아 당긴 것은 그 때였다. 사복 경찰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저항할 힘도, 그럴 겨를도 없었다. 자칫 다시 붙들려가 더 큰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 채 그가 이끄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에 무작정 ‘남쪽으로 간다’고 말했다. 자기도 남쪽으로 간다며 계속 말을 걸었다. 경기장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고 묻기에 ‘모든 게 좋았다’고 말했다.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느냐고 묻기에 ‘그런 일 없었다’고 말했다. 매를 맞지도 않았고, 밥도 잘 챙겨주더라고 말했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다. 온 몸의 힘을 모아 차를 박차고 도망을 치려는 데, 기력이 없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뒤쫓아 온 그 남자가 ‘몸 조심하라’며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고 가더라.” 한참을 걸어 친구 집에 도착한 그는 현관문을 두드린 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들 3개월 전에 이미 그가 죽은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면도를 하고, 목욕도 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따뜻하게 차려진 음식도 배불리 먹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이미 3개월 동안 딱딱한 바닥에서 생활해 온 터라 침대가 불편하게 느껴진 탓이다. 건강을 회복한 브루노는 동지들의 행방을 찾는 데 골몰했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투옥됐거나 이미 숨졌고, 더러는 망명을 떠난 뒤였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 지 파악하기 때까지는 6개월 가까이가 걸려야 했다. 이후 그는 혁명좌파운동(MIR)의 지하 조직원으로 반독재 투쟁을 이어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82년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제10구역 산악지대 넬투메에서 게릴라 조직 재건작업이 군부에 노출돼 20여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탄압의 광풍이 불면서 조직은 와해 위기에 처했고, 브루노는 다시 몸을 엎드리고 숨어 지내야 했다. 조직생활을 접은 그는 도시빈민 지원활동에 눈을 돌렸고, 지난 2000년부터는 원주민 인권운동에 전력하고 있다. “1973년 쿠데타가 나기 직전 남부지방에 갔던 이유는 당시 혁명좌파운동이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군부의 반발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 무장력을 갖추고 쿠데타에 대비해야 한다고 본 탓이다. 상당수 조직원들이 쿠바를 방문해 게릴라 훈련을 받았고, 나도 1972년 6개월 동안 쿠바에 머물며 산악 전투훈련을 받았다.” 혁명을 꿈꾸며 총을 들고 게릴라 훈련을 하던 시절 그는 친구들과 한가지 약속을 했다고 했다. 누군가 먼저 죽거든 첫 아이에게 그 친구의 이름을 물려 주자는 다짐이었다. 브루노는 첫 딸의 이름을 20대 초반에 숨진 친구 ‘클라우디오’의 이름을 따 클라우디아(29)로 지었다. 쿠바에서 영화를 전공한 뒤 현재 멕시코에서 영화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클라우디아가 지난 2003년 완성한 첫 작품의 제목은 <붉은 식탁보>였다. “쿠데타 직후 칠레 남부 산악지대를 헤메던 클라우디오는 한 농가에서 음식물을 구할 수 있었다. 친절한 농부는 꼭 다시 오라고 권했다. 클라우디오와 동료들은 농부의 말을 믿고 며칠 뒤 그 농가를 다시 찾아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몰살 당했다. 그때 농부는 게릴라가 왔다는 표시로 창가에 붉은 색 식탁보를 걸어 놓았다.” 낡은 흑백사진속엔 동지들의 흔적만이 인터뷰가 끝날 무렵 브루노는 낡은 흑색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아옌데 부부와 함께 한 때 브루노와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했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양복 저고리 단추를 푼 채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 맨 앞에서 걷고 있는 맥스 마라비오는 취임 당시 아옌데의 경호 책임자였다. 하지만 군부의 유혹에 넘어가 검은 이권을 챙긴 그는 쿠데타가 나기 전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마라비오 곁에 선 이는 마리오 멜라다. 군 출신으로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강제 예편 당한 그는 경호팀 ‘대통령의 친구들’의 조직체계를 세운 인물이다. 마지막까지 대통령궁을 지켰던 그는 쿠데타 직후 처형됐다. 아옌데 부부의 뒤에서 젊은 브루노가 앳된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한 채 걷고 있다. 그의 동지이자 ‘브루노’란 가명을 썼던 세르지오 블랑코 타레즈가 그 뒤에서 걷고 있다. 타레즈는 쿠데타가 났을 당시 경호팀 책임자을 맡고 있었고, 역시 쿠데타 직후 총살됐다. 사진을 보며 웃고 있는 브루노의 눈가에 다시 붉어졌다. 과학적 확증을 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바다의 해류가 바뀔 때, 그러니까 두 해류가 만날 때 바다에 모종의 변화가 있는 것 같다. 한가지 해류를 따라 갈 때는 파도가 없는 날에도 수평선을 바라보면 바다의 결이 느껴진다. 잔잔한 바다에 삐죽삐죽 잔 물결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연신 고개를 내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해류가 섞이는 지점에선 바다가 온통 점액질로 변해버리는 느낌이다. 파도가 제법 있는 날도 바다는 파열음을 내지 않고 움직임이 융단처럼 부드럽다. 부드럽다고 해서 거세지 않은 것은 아니니 흔들림이야 심하게 느껴지지만, 바다가 온통 한 몸이란 생각이 들 지경이다. 칠레를 출발한 이튿날에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가 변하고 있었다. 두 해류는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게 하나로 뒤엉켜 파도를 완만한 곡선으로 만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하루 이틀 간격으로 그러기를 두어 차례, 갑판에서 내려다 보니 옅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물빛이 낯익다. 카리브해에 다가선 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짙은 코발트 빛 바다가 반가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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