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 패권주의 갈파한 사회주의자
미국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본성을 갈파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해리 매그도프(92·사진)가 지난 1일 버몬트주 벌링턴 자택에서 숨졌다. 대공황과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격동기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살다간 그에게, 그가 발행인으로 일했던 <먼슬리 리뷰>는 “정신은 비관주의자였으나, 마음은 낙관주의자였다”는 헌사를 바쳤다.
그는 1913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페인트공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당시 브롱크스는 전쟁과 혁명이란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오는 ‘불온’한 곳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몰락하자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15살 때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처음 접한 그는 훗날 “심장을 두들겨맞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뉴욕시립대에 들어간 그는 ‘사회문제클럽’이라는 사회주의자 모임에 참여하면서 자본주의와 파시즘에 맞서는 투사로 성장한다. 1932년 전국학생연맹 창립에 가담한 그는 기관지 <스튜던트 리뷰> 편집자로서 영향력을 쌓아갔다. 그러나 그의 왕성한 활동은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는 빌미가 된다. 그는 뉴욕대로 옮겨 경제학을 파고든다.
대학을 나온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실업과 재취업에 대한 전국적 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는 이후 10여년 동안 정부의 노동 및 산업정책 분석가로 살아가는 계기가 된다. 그가 당시 개발한 제조업 생산성 측정 방법은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워싱턴으로 자리를 옮겨 생산능력을 100%로 끌어올릴 때 생기는 병목현상을 연구하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헨리 월라스 상무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그의 공직 생활은 전후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 광풍에 꺾이고 만다. 훗날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 상원의원이 소련에 기밀을 넘겨준 간첩단의 일원으로 그를 찍은 것이다. 그가 상원 청문회에 불려간다는 소식은 당시 <뉴욕타임스>의 1면을 장식했다고 한다. 그는 청문회에서 자신에게 덧씌워진 혐의에 대한 진술을 거부했다. 이후 그는 이름을 숨긴 채 금융분석가, 보험판매원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1965년 <미국 자본주의의 문제>라는 책을 내면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으로 다시 등장했다. 특히 1969년 미국이 공산주의를 봉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 <제국주의 시대>는 15개 언어로 번역돼 10만부 이상 팔려나가는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그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가 발행하던 <먼슬리 리뷰>의 공동발행인이 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는 뉴욕 42번가 신문가판대에서 <먼슬리 리뷰>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훗날 그는 이 잡지의 매력을 세 가지로 꼽았다. “이 잡지는 당시 금기였던 사회주의를 정면으로 다룬다. 스스로 정파를 초월해 독립적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명료하고 단순한 용어를 사용한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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