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제리 수도 알제 시내의 미로처럼 이어진 빈민 거주지 카사바의 시장에는 대낮에도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이 몰려다녀 외국인들은 방문을 꺼린다. 정부의 적극적인 서구화 정책으로 자본주의 문화가 알제리인들 사고방식에 깊이 침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여성들이 서구식 옷을 입고 다닌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해 공격에 나서기도 한다. 중동 다시 깊이보기 1. 아라파트 이후의 팔레스타인
2. 석유와 내전-수단의 명담
3. 이슬람주의 마지막 불꽃, 알제리
4. 중동의 관광대국 꿈꾸는 튀니지
5. 리비아, 투항인가 변신인가
6. 모로코의 정치개혁 실험
7. 중동평화와 이집트의 선택
8. 이슬람주의 산실, 알아즈하르 대학
9. 유헙행 둘러싼 터키의 고뇌
10. 좌담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알제리 수도 알제는 군데군데 백사장을 낀 해안, 근처에 넓게 펼쳐진 초록색 농경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백만 명이 넘는 알제리인들이 희생된 치열한 독립전쟁 끝에 1962년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량창고’였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떠올리게 했다. 낡은 공항을 빠져 나와 도착한 호텔은 경비가 삼엄했다. 1990년대 정부군과 이슬람 무장단체간에 8년 동안이나 계속됐던 치열한 내전의 여파와 마주친 듯했다. 제루알 전 대통령이 민족화합정책을 실시한 결과 내전이 공식적으로는 끝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장이슬람그룹(GIA) 등 이슬람 무장세력들이 정부군과 경찰에 대항해 민간인들을 여성·어린이 구별없이 무차별로 공격하는 사건들이 잇따라, 매달 100여명이 희생되고 있다. 독립직후 무장단체 결성 알제리 이슬람주의의 효시는 독립 직후인 1964년 초 발족한 알키얌(Al Qiyam al Islamiyya·이슬람 가치)이다. 무장단체인 알키얌은 알제리의 법·정치체제에서 이슬람이 지배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서구 관습의 영향을 받는 데 반대했다. 당시 알제리 정부는 완전한 이슬람법 실행, 술 판매금지, 공직에서 비무슬림 추방 등을 요구하던 알키얌을 해체하고 불법화했으며 주요 구성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1970년대에 다양한 새 조직으로 재등장한 이슬람주의 단체의 조직원들은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그곳에 가 소련과 맞서 싸웠으며, 전쟁이 끝난 뒤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와 알키얌이 요구했던 이슬람주의를 전파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반정부활동과 무장투쟁을 벌이게 된 계기는 1991년 실시된 총선을 무효화시킨 알제리 군부의 행태였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붕괴 이후, 알제리 사회주의 정부가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 실시한 총선에서 이슬람정당인 이슬람구세전선(FIS)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군부는 총선을 무효화시키고 이슬람구세전선을 불법화한 뒤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맞서 이슬람구원군(AIS:FIS의 군조직) 등 이슬람주의자들이 군부에 무력으로 저항하면서, 1992년부터 8년 동안 내전이 이어졌다. %%990002%%내전 기간에 등장한 무장이슬람그룹과 ‘부름과 전투를 위한 살라피스트그룹(GSPC)’ 등 여러 이슬람 무장단체들은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남부 사하라사막에 기지를 갖추고 조직원들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알카에다와도 연계돼 있다. 이제 도시에서는 군경의 추적을 받고, 농어촌에서는 주민들이 조직한 자경단에 밀려 세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현 알제리 정부 전복을 노리는 무장투쟁은 계속하고 있다. 8년 내전 이후로 유혈공방 알제리의 유력지 <알카바르>의 한 기자는 “사하라 사막에서 지금도 활동 중인 이슬람 무장단체는 표면적으로 이슬람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은 테러집단”이라고 말했다. 또 관광회사에서 근무하는 한 알제리인은 “그들은 이슬람단체가 아니라 도둑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 이슬람단체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면서 평가를 유보하는 알제리인들도 많고, 알제리 군부·자본가·관료가 중심인 권위주의 군부정권이 사회불안을 이용해 정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이슬람주의자들의 활동을 일정 정도 묵인하고 있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청년 실업자들과 구걸하는 이들, 개피담배를 파는 청소년들이 늘어서 있는 알제리 거리의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면 왜 이곳에서 이슬람주의가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는지 느낄 수 있다. 알제 시내에는 대낮에도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이 몰려다니고 있다. 빈민들이 밀집해 있는 카사바 지역의 재래시장에는 도둑이 우글거리고 외국인들은 방문을 꺼린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남루한 옷차림의 12살 짜리 개피담배 팔이 아이에게 왜 담배를 파느냐고 물었더니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변에는 값비싼 외제차들도 많았다. 내전 이후 정부가 개인과 공공의 소유권을 함께 보장하는 이슬람식 사회주의인 ‘이슈티라키야’를 버리고 급격하게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고, 이는 이슬람주의가 파고들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다. 남부에 넓은 사하라 사막을 끼고 있는 알제리는 막대한 원유와 가스를 갖고 있다. 2001년 국내총생산(GDP) 547억달러 중 석유·가스 부분이 35.5%를 차지했고, 그밖에 농업 9.2%, 석유 외의 공업 7.2%, 건축 및 정부조달공사 8.5% 등의 순이다. 석유수출대금의 많은 부분이 경찰과 군, 공무원과 퇴역군인 등에 대한 과도한 대우, 고급장비와 무기구입, 고위관리와 정치인의 부정축재 등 상층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쓰인다. 공식적으로는 2003년도 국방예산이 22억달러로 전체 예산 중 2번째를 차지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보다 더 많은 돈이 국방예산으로 쓰이고 있다. 석유로 벌어들인 돈이 산업기반 시설을 갖추고 고용을 창출하는 데는 별로 쓰이지 않고 있다. 국제원유가격에만 의존하는 국가경제는 불안하다. 정부는 석유수출대금의 일부로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식량과 필수품의 가격을 보존해주기 때문에 알제리인들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하고 있으나, 실업문제 등은 매우 심각하다. 총리-대통령 불화 권력갈등 알제리인들은 문제점을 알고 있으나 발설하지 못한 채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고, 정부 부패와 실업, 빈부격차는 이슬람극단주의의 온상이 되고 있다. 또한 민족해방전선(FLN)의 당수이자 당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벤플리스 총리와 부우테풀리카 대통령간의 협력관계가 끝나면서 기득권층 안에서도 정권다툼을 둘러싼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이슬람극단주의가 다시 알제리를 휩쓸지 소멸할지는 알제리 정부가 이런 부패와 경제문제, 서구문화에 포위돼 가고 있는 이슬람문화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에 달려 있다. 글·사진 금상문/정치학박사·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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