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의 삶
교수대서 꺾인 후세인의 삶
“당신은 우리를 파괴했다. 우리를 죽였다. 우리가 궁핍 속에서 살게 만들었다.”
“나는 너희를 궁핍과 고통에서 구했고 너희 적, 페르시아인과 미국인을 괴멸시켰다.”
30일 처형 직전까지, 사담 후세인 대통령과 교수형 집행자들 사이에 이런 설전이 벌어졌다고 <뉴욕타임스> 등이 31일 전했다. 이 설전처럼, 그의 삶은 ‘아랍 영웅’과 ‘독재자’라는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한때 중동 근대화 이끌고 미국 등 서구에 맞서 싸워
쿠르드족 학살·쿠웨이트 침공 ‘악의 축’ 지목당해 몰락 폭력과 피로 물든 ‘독재자’ 후세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불행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는 1937년 4월28일 바그다드 북쪽 티크리트 인근 알아우자 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난폭한 의붓아버지는 아스팔트를 입힌 회초리로 그를 때렸다. 1979년 대통령, 바트당 총재에 오른 그는 88년 두자일 마을에서 암살 위기를 겪은 뒤, 쿠르드족 148명을 처형해 보복했다. 이슬람 혁명 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확장을 우려한 후세인은 1980년에는 이란을 침공했다. 8년간의 전쟁은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라크군은 1988년 이란을 도왔다며 할라브자 마을에서 쿠르드족 5천명을 독가스로 살해했다.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침공해, 전 세계의 비난과 유엔의 제재를 받았다. 결국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에 6개월 만인 이듬해 2월 철수했다. 2001년 9·11테러 뒤에는 미국에 의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악의 축’으로 지목받았다. 2003년에는 미군이 침공하면서 24년을 지킨 권좌에서 쫓겨났고, 같은해 12월 고향 티크리트의 한 농가 토굴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미군에 붙잡혔다. 2005년 집단학살 혐의로 기소돼, 지난 26일 항소법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됐다. 그의 처형 뒤, 영국 마거릿 베케트 외무장관은 “그가 죗값을 치렀다”고 논평했다. 반면, ‘아랍 영웅’ 후세인은 십자군에 점령당한 예루살렘을 1187년 되찾은 살라딘(1138~1193)에 비견하는 인물로도 받들어진다. 영국·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킬 지도자로 여겨졌다. 그는 18살 때 바그다드로 상경,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에 심취했고, 1956년 2차 중동전쟁이 터지자 친영 이라크 왕정에 반대하는 폭동에 참가하고 바트당에 가입했다. 1958년 군부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린 카심 정권이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바트당을 탄압하자, 59년 카심 암살에 나섰다. 암살에 실패한 뒤 겪은 3년여의 해외도피, 1964~67년 투옥생활 등도 그의 ‘신화’를 키웠다. 1968년 31살에 이라크 2인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막대한 석유를 기반으로 이라크 경제성장을 이끌면서 민족국가화를 지휘했고, ‘중동 근대화의 희망’이었다. 이란 침공은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 수출 저지로, 쿠웨이트 침공은 친서방 정책에 대한 ‘응징’으로 여겨졌다. 1991년 미국의 미사일 세례로 바그다드가 초토화됐지만, 살아남아 미국을 조롱했다. 미국의 끈질긴 제거 공작과 경제제재 속에서도 그는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 건재했고, 1995년·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100%에 가까운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처형된 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각을 이끌고 있는 하마스는 “정치적 암살”이라고 비난했다. ‘독재자’이자 ‘아랍 영웅’ 후세인. 그는 교수대에서 검은 두건을 쓰기를 거부하고,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굵은 올가미에 매달려 목이 부러져 돌아갔다. 그의 주검은 고향 알아우자 마을에 31일 새벽 조용히 묻혔다. “순교자가 될 자격이 없지만, 불행히도 사담 후세인은 순교자가 될 위험성이 있다.” 유럽연합(EU) 루이 미셸 인도지원담당 집행위원은 이렇게 경고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쿠르드족 학살·쿠웨이트 침공 ‘악의 축’ 지목당해 몰락 폭력과 피로 물든 ‘독재자’ 후세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불행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는 1937년 4월28일 바그다드 북쪽 티크리트 인근 알아우자 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난폭한 의붓아버지는 아스팔트를 입힌 회초리로 그를 때렸다. 1979년 대통령, 바트당 총재에 오른 그는 88년 두자일 마을에서 암살 위기를 겪은 뒤, 쿠르드족 148명을 처형해 보복했다. 이슬람 혁명 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확장을 우려한 후세인은 1980년에는 이란을 침공했다. 8년간의 전쟁은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라크군은 1988년 이란을 도왔다며 할라브자 마을에서 쿠르드족 5천명을 독가스로 살해했다.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침공해, 전 세계의 비난과 유엔의 제재를 받았다. 결국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에 6개월 만인 이듬해 2월 철수했다. 2001년 9·11테러 뒤에는 미국에 의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악의 축’으로 지목받았다. 2003년에는 미군이 침공하면서 24년을 지킨 권좌에서 쫓겨났고, 같은해 12월 고향 티크리트의 한 농가 토굴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미군에 붙잡혔다. 2005년 집단학살 혐의로 기소돼, 지난 26일 항소법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됐다. 그의 처형 뒤, 영국 마거릿 베케트 외무장관은 “그가 죗값을 치렀다”고 논평했다. 반면, ‘아랍 영웅’ 후세인은 십자군에 점령당한 예루살렘을 1187년 되찾은 살라딘(1138~1193)에 비견하는 인물로도 받들어진다. 영국·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킬 지도자로 여겨졌다. 그는 18살 때 바그다드로 상경,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에 심취했고, 1956년 2차 중동전쟁이 터지자 친영 이라크 왕정에 반대하는 폭동에 참가하고 바트당에 가입했다. 1958년 군부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린 카심 정권이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바트당을 탄압하자, 59년 카심 암살에 나섰다. 암살에 실패한 뒤 겪은 3년여의 해외도피, 1964~67년 투옥생활 등도 그의 ‘신화’를 키웠다. 1968년 31살에 이라크 2인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막대한 석유를 기반으로 이라크 경제성장을 이끌면서 민족국가화를 지휘했고, ‘중동 근대화의 희망’이었다. 이란 침공은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 수출 저지로, 쿠웨이트 침공은 친서방 정책에 대한 ‘응징’으로 여겨졌다. 1991년 미국의 미사일 세례로 바그다드가 초토화됐지만, 살아남아 미국을 조롱했다. 미국의 끈질긴 제거 공작과 경제제재 속에서도 그는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 건재했고, 1995년·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100%에 가까운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처형된 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각을 이끌고 있는 하마스는 “정치적 암살”이라고 비난했다. ‘독재자’이자 ‘아랍 영웅’ 후세인. 그는 교수대에서 검은 두건을 쓰기를 거부하고,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굵은 올가미에 매달려 목이 부러져 돌아갔다. 그의 주검은 고향 알아우자 마을에 31일 새벽 조용히 묻혔다. “순교자가 될 자격이 없지만, 불행히도 사담 후세인은 순교자가 될 위험성이 있다.” 유럽연합(EU) 루이 미셸 인도지원담당 집행위원은 이렇게 경고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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