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공동소유 기반 공동체 사유화 바람
공업화-외부인력 유입-소비주의 등이 요인
공업화-외부인력 유입-소비주의 등이 요인
1955년 27살 때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건너온 앨런 샤피로 앞에는 “시장 대신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이상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펼쳐져 있었다. ‘갈릴리호와 요르단강이 만나는’ 이스라엘 땅에 1909년 최초로 건설된 키부츠 ‘데가니아’였다.
은퇴한 교수인 샤피로 부부는 17일 시대의 변화에 밀려 이 키부츠의 ‘사유화’에 동의하는 표를 던지고 말았다. 수년 전 대다수가 사유화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던 320명의 구성원들은 이번에는 찬성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사유화는 차등임금, 개인계좌 개설, 서비스요금 지불 등 여태껏 지켜온 가치와 반대되는 제도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0일 “슬프다. 전통적인 키부츠가 그립다”는 샤피로의 말을 전했다. 1990년을 전후해 번진 사유화 바람은 260여개 키부츠 대부분을 변화시키고, 데가니아까지 동참하면서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고 있다.
이스라엘 ‘재건 신화’의 주축인 키부츠는 자발적 공동소유제를 채택한 독특한 공동체다. 각 키부츠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동 소유·공동 육아·공동 식사·직접민주주의 등의 운영시스템을 일궜다. 현금도 개인계좌도 필요없는 곳이 많았고, 일부는 옷까지 공동소유로 했다. 키부츠 밖에 일자리가 있는 구성원은 소득을 공동체에 귀속시켜야 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는 이념 정립에는 독일 출신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이 컸다.
키부츠는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군사 목적에 의한 건설과 구성원들의 참전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구는 이스라엘 전체의 7%를 넘긴 적이 없지만, 많은 정치·군사 지도자들의 산실이 됐다.
그러나 자급자족적 농업공동체로 출발한 키부츠는 공업화와 외부 노동력 유입에 따라 변질돼왔다. 현재는 키부츠 인구의 15%만이 농업에 종사하고, 노동력의 40% 가까이가 타이인들과 아랍인들이다. “착취하지도 착취당하지도 않는” 유대인들만의 공동체 구현이 구조적으로 힘들게 됐다. 소비주의와 개인주의, 유대교의 침투도 키부츠의 사회주의적 전통을 무너뜨리는 데 한몫했다.
부유한 공동체의 상징이던 많은 키부츠들은 1980년대에 인플레이션을 기대하고 마련한 은행빚에도 발목이 잡혀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채무조정을 위해 땅 2천㏊와 낙농조합 지분을 처분하려는 연합단체인 ‘키부츠운동’의 정책이 일부 키부츠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고 20일 보도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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