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유력 일간 〈더뉴스〉의 유수프자이는 9·11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라덴을 두번 인터뷰하는 등 탈레반에 대한 최고 권위자로 뽑힌다.
‘아프간 피랍 사태’ 현지 언론인 리포트
지난 5월12일 탈레반 사령관 물라 다둘라(41)의 사망은 탈레반에게 2001년 12월 권력에서 실각한 이래 최대의 충격이었다. 한국인 인질 사건 발생 2달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이후 탈레반의 내부 지형도를 현격히 바꿔 놓았고, 현 사태와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탈레반의 얼굴’ 이었던 다둘라의 죽음은 그 어떤 탈레반 고위인사의 죽음과도 견줄 수 없다. 그는 국제 언론과의 직접 접촉을 꺼리지 않았으며, 왼쪽 다리를 잃은 뒤에도 언제나 전선의 최전선에 서는 전사였다.
다둘라는 아프가니스탄 중부와 남서부의 4개주(우루즈간·님루즈·칸다하르·헬만드)의 현장 전투를 책임지는 사령관이었다. 그는 휘하에 병사 1만2천명을 거느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장된 숫자일 수 있지만, 탈레반 사령관 가운데 최대 규모다. 자신의 명령에 따라 공격에 나서는 전사만 500~2000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영상에서 자살폭탄테러에 나설 이들을 껴안으며 “당신들이 우리의 크루즈 미사일이고 스팅어 미사일”이라고 치켜올리곤 했다.
그는 2001년 탈레반 정부 실각 뒤 텔레비전에 출연한 첫 탈레반 고위 지도자였다.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이 반이슬람적이라고 믿는 탈레반 지도자들의 비판도 있었다. 다둘라가 스파이와 인질들의 참수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은 것도 ‘탈레반의 위신을 깎아 먹는다’는 지적이 받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런 전술은 그에게 ‘유사종교의 교주’ 위상을 부여했다. 2001년 북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북부동맹에 포위됐던 다둘라가 감행한 과감한 탈출작전은 탈레반에게 유명한 사건이다.
다둘라는 잔혹했다. 그는 바미안과 발크주에서 시아파인 하자라족의 인종청소를 지휘하는 등 패배한 세력에 무자비했다.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그의 잔혹함에 책임을 물어 계급장을 떼고 고향 우루즈간주로 돌려 보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마르는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뒤 다둘라를 다시 데려올 수 밖에 없었다. 오마르는 다둘라를 탈레반 최고 결정기구인 탈레반 지도자위원회(슈라)의 10인 대표 중 한명으로 임명했다.
다둘라의 죽음으로 슈라의 초기 멤버 10명 중 3명이 사망했다. 오마르는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후임자들의 임명을 미루고 있다. 다둘라의 죽음으로 드러난 보안상 허점과 이후 이어진 통신두절 등 어려움으로 아프간에서 탈레반의 투쟁 지형은 급변하고 있다.
최근 탈레반은 더욱 소규모로 움직이며 각 조직마다의 독립적 성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특정한 공격이나 납치 사건에서 탈레반 중앙의 지도를 받고 움직이기보다는, 각 조직이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사고를 친 뒤’ 중앙에 보고하는 경우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도 탈레반은 우연히 한국인들을 발견하고 일단 납치한 뒤 중앙에 보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다둘라의 사망은 장기적으로 탈레반을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잃은 뒤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자살폭탄 테러와 폭격도 급증하고 있다. 중요 인사 석방을 위해 인질을 납치하는 행위는 더욱 횡행할 것이다. 다둘라의 죽음이라는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전통에 반해 ‘여성들까지도 죽이겠다’는 탈레반의 절박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페샤와르/라히물라 유수프자이 <더뉴스〉 선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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