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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0 19:34 수정 : 2005.01.10 19:34

9일 치러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선거에서 마무드 아바스 후보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된 뒤 요르단강 서안의 라말라에서 지지자들이 그의 당선을 자축하고 있다. 라말라/AFP 연합


선거직후 하마스등 일단 “협력”표명
무장세력 연계 정파들과 협의 쉽지않을듯

■‘팔’선거 배경과 전망

9일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선거가 예상대로 온건 성향의 마무드 아바스(69)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의 압도적 승리로 끝나자, 팔레스타인 내부와 서방, 이스라엘 모두 야세르 아라파트 시대와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로 고무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내부상황이 더 큰 과제= 지난해 11월11일 야세르 아라파트가 숨을 거둔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단 2%의 지지율을 얻는데 그쳤던 아바스 의장이 불과 두달여 만에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것은 변화에 대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열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라파트의 측근이었던 칼리드 야즈지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바스 의장이 어렵더라도 과감한 결단을 내려 혼란스러운 팔레스타인 정치권에 질서를 잡고, 주민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현실은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엔 너무 열악하다. 이스라엘군의 폭력과 가혹한 점령정책에 지칠대로 지친 민심, 자치정부의 부패와 만연한 빈곤, 살인적인 실업률 등 만신창이가 된 팔레스타인 사회를 쉽게 바꿔놓을 ‘도깨비 방망이’는 없기 때문이다.

수반 선거 불참을 선언했던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 등 이슬람 진영이 선거 직후 앞다퉈 “새 수반과 협력할 것”이라고 밝히곤 있지만, 자치정부 내부에만 14개에 이르는 서로 다른 무장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개혁과정에서 이들과 연계된 정치세력과 마찰을 피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아바스는 누구?= ‘아부 마젠’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아바스는 1935년 당시 영국령 팔레스타인땅 사파드에서 태어났다. 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중동 각지로 쫓겨나기 시작하면서 가족과 함께 시리아로 이주한 그는 잠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기도 했으며, 시리아 다마스쿠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옛 소련 모스크바대학에서 시오니즘과 나치즘의 관련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그가 “유대인 대학살은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지금도 이스라엘 극우진영에서 그를 ‘양의 탈을 쓴 늑대’ 쯤으로 여기는 계기가 됐다.

카타르에서 잠시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한 그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아라파트 전 수반과 함께 팔레스타인 최대 정파인 파타운동을 공동 창설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실행위원을 비롯해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70년대부터 이스라엘 좌파 및 평화주의 그룹과 대화를 시도하는 등 일찌감치 협상을 통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노선을 걸었다. 93년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당시 팔레스타인을 대표해 협정서에 서명한 인물이 아바스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외국 땅을 떠돈 지 48년만인 95년 9월 마침내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한 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지속하는 한편 96년 1월 치러진 초대 자치의회 선거 당시 선거관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0년 9월 제2차 인티파다(민중봉기)가 시작되고, 이스라엘의 초강경 정책이 지속되면서 위기에 몰린 아라파트는 2003년 3월 아바스를 자치정부 초대 총리에 임명했다. 하지만 아라파트는 보안인력 통수권을 포함해 어떤 권력도 넘겨주지 않았고, 무장세력과의 알력까지 이어지면서 그는 결국 같은 해 9월 스스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재기를 모색해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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