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안팎으로 ‘정치적 실체 공식화’ 효과

아프가니스탄 피랍자 가족들이 29일 오후 경남 고성에 도착해 고 심성민씨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심씨 가족들이 집을 비워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사진공동취재단

탈레반은 표면적으로는 인질 석방 협상에서 별로 챙긴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것을 얻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국인들을 납치·억류한 가즈니주 카라바그 지역 탈레반 사령관 압둘라는 28일 피랍자 전원 석방 방침 발표 뒤 “인도주의적 고려”를 거론하며 한국군 철수와 선교 금지 외의 추가 합의는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이런 사안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이고, 핵심 요구인 수감자 석방이 공개된 합의에는 포함돼 있지 않은데도 탈레반이 흡족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교도·외국군 축출’ 정치선전 재료 활용

일부 수감자 ‘라마단 특사’ 실리도 챙길듯

‘여성납치·2명 살해’ 일부 이미지 손실도

전문가들은 40여일 동안의 사태 전개에서 탈레반이 얻은 최대의 수확을 ‘정치적 정당성’ 확보로 보고 있다. 탈레반은 한국 정부와 직접협상을 벌여 정치적 실체임을 안팎에 공식화했다. 탈레반이 실각 이후 아프간 정부 영내의 공개석상에서 기자회견을 한 것은 이번 인질사태가 처음이다. 미국과 유엔한테도 인질 석방협상을 벌이자며 사건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두바이에 있는 걸프연구센터의 무스타파 알라니는 <에이피>(AP) 통신 인터뷰에서 “탈레반은 요구 조건 모두를 관철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정치적 위신 면에서 얻은 게 많다”며 “아프간 땅에서 한국 정부와 직접협상을 벌인 것 자체가 성과”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아프간 국민들에 대한 탈레반의 선전 재료로도 훌륭하다. 자신들이 ‘이교도 선교사들과 외국 군대를 내쫓았다’고 내세울 수 있다. 미군 등의 오폭으로 올해만 6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숨진 아프간의 반외국군 정서에도 호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프간에서는 외국군과 정부에 대한 염증으로 탈레반 지지자들이 차츰 늘고 있다.

다음달 이슬람 금식월을 앞두고 아프간 정부가 노약자를 중심으로 탈레반 연루자들을 풀어주려 하고, 이런 방침이 석방 협상과 관련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결국 탈레반은 명분과 실리를 두루 챙겼다는 평가가 가능한 셈이다. 압둘라 사령관은 미국 <시비에스>(CBS) 방송으로부터 “납치를 계속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납치는) 매우 훌륭한 전략”이라고 대답하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아프간 정부 쪽에서 볼멘 소리가 나오는 것 또한 탈레반이 이번 사태를 통해 얼마나 입지를 강화했는지 잘 보여준다. 아민 파랑 아프간 무역산업장관은 독일 신문 인터뷰에서 “만일 모든 정부가 이렇게 (한국 정부처럼) 행동한다면 이는 무조건적인 항복의 시작”이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이슬람 전통에 어긋나는 여성 납치나 인질 2명 살해에 따른 비난 여론 등으로 탈레반 또한 일부 이미지 손실을 입은 것은 분명하다. 탈레반의 기세가 오르는 데 비례해 미군과 나토군의 공세도 강화되고 있다.

이본영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