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성향 후보 일색으로 김빠진 분위기로 흐르던 이란 대선에서 투표일(14일)이 다가오자 개혁파의 결집이 나타나고 있다. 후보들 중 가장 중도적인 하산 로하니 후보에게 개혁파의 상징인 모하마드 하타미, 알리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이 공개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하타미 전 대통령은 1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나라에 대한 의무와 국민들을 위해 나는 로하니에게 투표할 것”이라며 “이란의 존엄성과 발전을 원하는 개혁층은 로하니에게 투표해 달라”고 밝혔다. 라프산자니도 이날 “로하니는 다른 후보들보다 행정부를 더 잘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하니는 하타미 대통령 시절인 2003~2005년 서방 국가들과의 핵협상 대표로 활동한 인물로 성직자 출신이지만 개혁파와도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출마 선언 직후부터 다른 어느 후보들보다도 여성들과 소수민족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이며, 행정부에 ‘여성부’를 신설하겠다고 공약하며 보수와 거리를 뒀다. 로하니는 핵협상을 벌일 당시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허용하며 유연한 자세를 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핵민족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 이후, 그는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로하니 사임 이후 새 협상 대표가 된 사이드 잘릴리는 이번 선거에서 강경 보수의 대표주자로 나서 로하니와 경쟁하고 있다.
하타미·라프산자니의 지지 이외에도 하타미 대통령 때 부통령을 지낸 모하마드 레자 아레프 후보가 사퇴한 것도 로하니에게 큰 도움이 됐다. 아레프 후보는 11일 자신의 웹사이트에 “하타미 대통령한테서 대선을 끝까지 치르는 게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편지를 받았다”며 후보 사퇴를 밝혔다.
이번 선거는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30여년 동안 가장 활기 없는 선거로 평가되고 있다. 이란은 신정정치라는 좁은 정치지형 속에서도 선거에선 강경-개혁 후보들이 경쟁하는 ‘합리적 구도’가 형성돼 왔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1981~89년), 라프산자니(1989~97년), 하타미(1997~2005년), 아마디네자드(2005~2013년) 등 강경보수-온건개혁-개혁-강경보수가 8년마다 정권 교체를 이뤘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성직자 그룹은 라프산자니의 등판을 아예 저지해버렸고, 표심을 둘 곳 없는 개혁중도 성향 유권자들은 무력감 속에 선거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외신들도 일제히 테헤란 도심에서도 선거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맥빠진 분위기를 전해왔다. 하지만 하타미·라프산자니와 아레프의 공조는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선거 막바지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란 전문가인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는 “하타미 등의 지지로 인해 개혁 유권자층에게 돌파구가 마련됐다”며 “이제 개혁과 보수의 양대 구도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개혁파가 뭉치자, 보수 진영도 긴장하고 있다. 이란 보수 일간지인 <카이한>은 이날 “보수 진영이 분열하면 보수 후보들은 개혁 후보들보다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기게 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말 헌법수호위원회가 후보로 확정한 8명 중 아레프와 로하니를 빼면 6명 모두 강경보수에 속하는데, 골람 알리 하다드아델 전 국회의장의 사퇴로 보수 진영에선 5명이 경쟁하고 있다. 이 중 사이드 잘릴리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경제난을 타개할 능력’을 내세우는 모하마드 바케르 칼리바프 테헤란 시장, 하메네이와 가장 가까운 알리 악바르 벨라야티 전 외무장관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란은 1차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1·2위 후보를 대상으로 결선을 치른다. 어느 후보도 압도적 지지를 받는 후보가 없어서, 이번 선거도 2차 선거에서 판가름날 가능성이 높다. 2차 선거는 21일 열린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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