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난민기구 공식보고서 발표
난민 280만명중 80% 여성·아동
여성 가장이 14만5천가구 책임져
텐트생활·식량난·외부폭력 위협
난민 280만명중 80% 여성·아동
여성 가장이 14만5천가구 책임져
텐트생활·식량난·외부폭력 위협
“아침밥을 일부러 늦게 먹는다. 그래야 점심을 늦게 먹어도 되니까….”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85㎞쯤 떨어진 트리폴리 외곽의 구릉지대, 버려진 건물 한켠에 살고 있는 간호사 출신 시리아 난민 파디아(가명)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 두 끼로 만족해야 하는 신산한 난민살이, 고기와 채소는 ‘사치품’이 된 지 오래다. 식량이 떨어질 무렵이면, 하루 한 끼도 힘들다. 파디아는 “그나마 한달에 한번 (난민지원단체를 통해) 식량 배급을 받는 날 고기 구경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5월 쿠사이르의 고향 집으로 폭탄이 날아들어 남편이 목숨을 잃은 뒤, 어린 자녀 4명의 손을 잡고 국경을 넘었다.
2011년 3월5일 시작된 시리아 내전이 9일로 3년3개월24일째를 맞았다. 그동안 전쟁의 포화를 피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 이들은 유엔난민기구(UNHCR·이하 난민기구) 공식 집계로만 280만명에 이른다. 이들 중 80%는 여성과 어린이다. 난민기구는 “시리아 난민 가정 4분의 1에 해당하는 14만5000여가구의 가장이 여성”이라고 밝혔다.
난민기구가 지난 2~4월 레바논 등 3개국에서 난민 여성 135명을 대상으로 면접 조사해 9일 내놓은 <여성 홀로: 시리아 난민 여성의 생존투쟁>이란 보고서를 보면, 하루아침에 낯선 땅에서 가장이 된 그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리나(가명)는 2년 전 남편이 정부군에 체포돼 소식이 끊긴 뒤 국경을 넘었다. 벌써 1년 넘게 텐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자녀 7명 가운데 3명은 건선(만성 피부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아이들이 어린데다 아프기까지 해서, 밖에 나가 일자리를 구하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말했다.
밥은 못 먹어도, 약은 먹어야 한다. 약값을 마련하려면, 먹을 것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약을 먹이지 못하는 날이 있다. 가려움증에 힘겨워하는 아이들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한다. 그럴 때마다 다짐한다. ‘엄마가 강해져야 한다.’ 리나는 “눈물이 쏟아질 때면, 숨어 혼자서 흐느끼곤 한다. 아이들에게 눈물을 보일 순 없다. 내가 약해지면 아이들이 힘들어진다”며 애써 웃었다.
여성과 아이뿐인 가정은 ‘외부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난민기구 조사 결과, 여성이 가장인 난민가구의 15%는 텐트 등 간이시설에서, 25%는 완공되지 않은 집이나 창고·차고 등에서 생활하고 있다. 조사 대상자의 약 60%가 “일상적으로 가족의 안전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답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 머물고 있는 마지다(36·가명)는 최근 5차례나 ‘결혼 신청’을 받았다. 청혼의 대상은 그가 아니라, 14살 난 딸이다. 마지다는 “외국에서 왔다는 한 남성은 돈과 쌀, 고기 따위를 싸들고 여러차례 집으로 찾아오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난민기구는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식량 배급 등 필수적인 때를 제외하고는 아예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여성이 전체의 30%를 넘는다”고 전했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요르단에서 8명의 자녀를 홀로 키우고 있는 술라이마(가명)의 막막한 난민살이를 보듬어 준 것은 이웃에 사는 팔레스타인계 여성이었다. 매트리스를 내어주고, 빵과 물을 가져왔다. 겨울에는 난로도 빌려줬다. 집세도 여러 번 대신 내줬다. 그는 “‘꼭 갚겠다’고 말은 했지만, 일자리도 없는 내가 어떻게 갚겠나. 친자매 간에도 이렇게 잘해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술라이마가 미안해할 때마다, 팔레스타인 친구는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내가 그 마음 잘 알아. 나도 난민 출신이야.”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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