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조작·부패’ 아로요 대통령 ‘버티기’…쿠데타설만 ‘솔솔’
오는 25일은 필리핀의 이른바 ‘피플 파워’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을 축출한 날이다. 1986년 이날 마르코스 대통령은 코라손 아키노에게 권력을 내놓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요즘 필리핀에는 그때의 정치적 낙관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25일에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 사임을 촉구하는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예정돼 있는 상황이 그런 현실을 웅변한다. 아로요 대통령은 선거 조작 의혹과 부패 혐의로 곤경에 빠져 있다.
아로요 대통령의 정치적 취약성은 최근 마닐라를 감도는 군부 쿠데타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20일 대통령궁 쓰레기통에서 일어난 폭발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두 개의 군부단체가 밝혔다. 이들은 “아로요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 저항을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폭발에 대해 페인트 시너가 담뱃불에 터졌을 뿐이라는 대통령궁의 해명이 나온 직후다.
최근 레이테섬을 덮친 산사태 참사도 아로요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을 시험한다. 야당과 언론들은 정부의 책임을 거론하며 아로요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다. 정치 분석가들은 아로요 대통령이 이번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지 못하면 ‘정치적 산사태’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아로요 대통령은 2004년 대선 개표 조작 의혹으로 이미 정통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 선거관리위원과 통화하며 상대 후보와 표차를 논의하는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촉발된 이 사태로, 아로요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발표해야 했다. 사임 압력을 피하기 위해 비리 의혹을 받아온 남편을 국외로 내보내고 측근들을 해임했다. 하지만 아직껏 정세를 반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최근엔 내각제 개헌이라는 카드를 추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로요 대통령의 사임을 점치는 전문가들은 많지 않다. 필리핀의 4대 정치세력인 군부와 가톨릭, 자본가와 빈민들의 연대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군 지도부는 공개적으로 아로요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고 있다. 가톨릭은 그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필리핀의 피플 파워가 쇠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86년의 성공이 지배층 내부의 교체로 귀결되고,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회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정치분석가 데이비드 팀버만은 “피플 파워의 전리품인 선거가 정당성의 근원이 아니라 정쟁의 원천으로 변질되면서 정치적 실망감을 확산시켰다”고 말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은 21일 이를 필리핀의 ‘피플 파워 피로증’이라고 지적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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