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없다, 수교 기대, 합법거래 겨냥 아니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17일 독일 베를린 연설은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의 표현을 통해 북한의 안전보장을 거듭 확인하면서 북한과의 핵 협상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미국판 '베를린 선언'으로도 불릴 만하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담을 3개월 앞두고 베를린 연설에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천명했었다.
힐 차관보의 연설은 연설자의 정부 직위나 대북 메시지의 획기성 면에서 이에 미치지 못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기존 대북 언급과는 여러면에서 차이나는 데다, 부시 행정부 이래 베이징(北京) 밖에서 실질적인 북.미 양자회담이 처음 열린 사실까지 배경에 깔림으로써 '변화'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미 정부 고위관계자들의 대외 연설은 관련 기관들의 사전 심의를 거치는 게 상례이기 때문에 힐 차관보의 연설도 국무부는 물론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의 승인을 받았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악의(animosity) 없다" = 힐 차관보는 "우리는 북한 사람들(people)에 대한 악의가 없다"고 말했다.
"악의"는 북한이 사용하는 "적의(hostility)"라는 말과 어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북한식 표현을 따르는 것을 피하면서도, 북한이 미국에 대고 "적대 정책"을 폐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볼 수 있다.
부시 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힐 차관보는 그동안 대북 공격 의사가 없다는 점은 여러차례 천명했으나 "적대 정책"이나 "적대 의도"에 관한 요구엔 응대하지 않아왔다. 라이스 장관은 "우리는 북한 주민과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해 주민들에 대해선 적의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그러나 힐 차관보의 "북한 사람들"은 전후 문맥상 지도부와 주민간 분리 여부가 불분명하다. 그는 북한의 안전보장 문제에 언급하면서 "6자회담에선 북한측(North Koreans)과 함께 앉아 우리가 뭘 하려는 생각인지, 우리의 의도가 뭔지를 그들이 매우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악의가 없다. 우리는 정말 9.19 공동성명상의 우리의 의무에 따라 북한과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요구에 답하되 미국내 여론도 의식한 기법으로 보인다. 이 연설문 작성 과정에서의 사려와 고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계정상화 "기대" = 9.19 공동성명에선 북한과 미국이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고 돼 있고, 그 이후 부시 행정부 고위관계자들은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대북 수교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may)"라고 늘 단정적인 표현을 피했다. 그러나 힐 차관보의 베를린 연설은 "우리는 비핵화된 북한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기대하고 있다(look forward to)" "우리는 정말 9.19 공동성명상의 우리의 의무에 따라 북한과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그 길을 갈 준비가 돼 있으며, 북한이 그 길을 따라갈 때 북한에 손을 내밀 준비가 돼 있다"는 등으로 어느 때보다 강한 표현으로 수교 협상을 언약했다. ◇"합법적 거래 충격 의도없다" = 힐 차관보는 연설 후 '대북 금융제재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재무부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에 대한 제재가 북한의 "합법적인 무역과 금융에 영향이나 충격을 미칠 의도는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스튜어트 레비 차관 등 미 재무부 고위관계자들은 북한의 경우 합법과 불법을 구분하기 어렵다며 전 세계 금융기관들에 대해 대북 거래의 위험성을 깨달아 합법거래도 하지 말 것을 공개 종용해왔다. 불법도 합법을 가장하는 경우가 많고,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들어갈 소지가 있는 돈줄은 모두 죄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 안팎의 정권교체론자들은 합.불법을 막론하고 북한의 금융과 무역차단이 북한 정권의 붕괴를 초래하거나 촉진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타내왔다. 힐 차관보와 재무부 관계자들의 이러한 차이는 부시 행정부내 대북 온건론과 강경론의 대립을 새삼 확인시키는 것이다. 힐 차관보는 이어 제재 효과에 대해선, BDA 문제의 경우 "북한의 국제 금융거래에 어느정도 충격을 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으나, 유엔 안보리의 결의와 사치품 금수의 경우는 "현 시점에서 직접적인 영향이 어떠한지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덧붙였다. BDA의 제재 효과에 대한 힐 차관보의 평가는 재무부측의 평가에 비해 밋밋한 것이다. '합법' 자금의 해제 전망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부상과 잠수를 되풀이 하는 가운데 최근 다시 로이터 통신이 750만달러 해제 가능성을 보도함으로써 힐 차관보의 말이 주목된다. 힐 차관보는 미 재무부와 북한측간 베이징 회담 후 재무부측이 북한측에 "몇가지 추가 질문을 했다"며 차기 금융회담에서 이 추가 질문들에 대한 후속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북한측의 답변내용이 BDA 문제의 해결에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6자회담 종착지는 동북아 안보체제" = 힐 차관보는 6자회담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지만, "9.19 공동성명의 핵심측면의 하나는 종국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달성한다는 대목"이라고 말하고 6자회담의 궁극적인 비전은 "북핵 문제 해결 이후 미래의 동북아 안보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북한의 안전보장은 핵무기가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통합된" 동북아의 안보틀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는 대북 메시지이기도 하다. 윤동영 특파원 ydy@yna.co.kr (워싱턴=연합뉴스)
부시 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힐 차관보는 그동안 대북 공격 의사가 없다는 점은 여러차례 천명했으나 "적대 정책"이나 "적대 의도"에 관한 요구엔 응대하지 않아왔다. 라이스 장관은 "우리는 북한 주민과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해 주민들에 대해선 적의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그러나 힐 차관보의 "북한 사람들"은 전후 문맥상 지도부와 주민간 분리 여부가 불분명하다. 그는 북한의 안전보장 문제에 언급하면서 "6자회담에선 북한측(North Koreans)과 함께 앉아 우리가 뭘 하려는 생각인지, 우리의 의도가 뭔지를 그들이 매우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악의가 없다. 우리는 정말 9.19 공동성명상의 우리의 의무에 따라 북한과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요구에 답하되 미국내 여론도 의식한 기법으로 보인다. 이 연설문 작성 과정에서의 사려와 고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계정상화 "기대" = 9.19 공동성명에선 북한과 미국이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고 돼 있고, 그 이후 부시 행정부 고위관계자들은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대북 수교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may)"라고 늘 단정적인 표현을 피했다. 그러나 힐 차관보의 베를린 연설은 "우리는 비핵화된 북한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기대하고 있다(look forward to)" "우리는 정말 9.19 공동성명상의 우리의 의무에 따라 북한과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그 길을 갈 준비가 돼 있으며, 북한이 그 길을 따라갈 때 북한에 손을 내밀 준비가 돼 있다"는 등으로 어느 때보다 강한 표현으로 수교 협상을 언약했다. ◇"합법적 거래 충격 의도없다" = 힐 차관보는 연설 후 '대북 금융제재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재무부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에 대한 제재가 북한의 "합법적인 무역과 금융에 영향이나 충격을 미칠 의도는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스튜어트 레비 차관 등 미 재무부 고위관계자들은 북한의 경우 합법과 불법을 구분하기 어렵다며 전 세계 금융기관들에 대해 대북 거래의 위험성을 깨달아 합법거래도 하지 말 것을 공개 종용해왔다. 불법도 합법을 가장하는 경우가 많고,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들어갈 소지가 있는 돈줄은 모두 죄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 안팎의 정권교체론자들은 합.불법을 막론하고 북한의 금융과 무역차단이 북한 정권의 붕괴를 초래하거나 촉진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타내왔다. 힐 차관보와 재무부 관계자들의 이러한 차이는 부시 행정부내 대북 온건론과 강경론의 대립을 새삼 확인시키는 것이다. 힐 차관보는 이어 제재 효과에 대해선, BDA 문제의 경우 "북한의 국제 금융거래에 어느정도 충격을 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으나, 유엔 안보리의 결의와 사치품 금수의 경우는 "현 시점에서 직접적인 영향이 어떠한지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덧붙였다. BDA의 제재 효과에 대한 힐 차관보의 평가는 재무부측의 평가에 비해 밋밋한 것이다. '합법' 자금의 해제 전망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부상과 잠수를 되풀이 하는 가운데 최근 다시 로이터 통신이 750만달러 해제 가능성을 보도함으로써 힐 차관보의 말이 주목된다. 힐 차관보는 미 재무부와 북한측간 베이징 회담 후 재무부측이 북한측에 "몇가지 추가 질문을 했다"며 차기 금융회담에서 이 추가 질문들에 대한 후속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북한측의 답변내용이 BDA 문제의 해결에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6자회담 종착지는 동북아 안보체제" = 힐 차관보는 6자회담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지만, "9.19 공동성명의 핵심측면의 하나는 종국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달성한다는 대목"이라고 말하고 6자회담의 궁극적인 비전은 "북핵 문제 해결 이후 미래의 동북아 안보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북한의 안전보장은 핵무기가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통합된" 동북아의 안보틀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는 대북 메시지이기도 하다. 윤동영 특파원 ydy@yna.co.kr (워싱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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