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시위상황을 영상으로 기록하려다 군정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가족들을 남겨두고 홀로 태국으로 피신한 미얀마 교민 정범래(41)씨. (연합)
"미얀마 사태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군부가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으니까요. 386세대로서 사명감이 느껴져 이를 영상기록으로 남기려다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미얀마 군정이 평화적인 가두행진에 대해 강제 진압에 나선 26일밤 서둘러 부인(46)과 아들(16)을 남겨두고 홀로 태국으로 피신한 정범래(41)씨는 미얀마 시위 현장은 '감동' 그 자체였다며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열띤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들려줬다.
정씨는 2001년 2월에 미얀마에 정착, 여행사를 운영하며 7년째 양곤에 살고 있으며 아마추어 사진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미얀마 군정의 급격한 유가인상으로 촉발된 민생시위가 일어나던 지난달 17일부터 태국으로 탈출할 때까지 상황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아 일부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 (http://cafe.naver.com/myabiz.cafe)에 게재해 미얀마 시위 상황을 알리는데 앞장서왔다.
다음은 정 씨와의 일문일답.
--어떻게 태국으로 피신해왔나.
▲미얀마 군부가 나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평소 알고 지내던 미얀마 보안부대 지인으로부터 귀띔받았다. 한인회에서도 다른 경로로 나에게 체포령이 내려진 것을 알아채고 빨리 피하라고 충고해줬다. 서둘러 가족들을 남겨둔 채 26일 밤에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왜 체포령이 내려졌는가.
▲85학번으로 6월 항쟁에 참여했었다. 나는 이번에 미얀마 시위를 지켜보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비슷한 점을 많이 느꼈다. 군부가 언론을 철저히 통제한 점 등이 더욱 그렇다. 광주 항쟁 때도 진실이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다. 이를 영상으로 담아 외부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느껴졌다. 미얀마 군부가 통금령과 집회 금지령을 내린 뒤에도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다녔다. 미얀마에서는 시위 모습을 영상으로 담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이런 나의 모습이 눈에 띄어 체포령이 내려진 것으로 안다. --시위 상황은. ▲급격한 유가 인상으로 촉발된 민생시위는 참여도가 극히 저조했다. 많아야 100여명 정도였다. 시위 주동자들이 체포되자 그마저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45년간 군부 통치 아래 있던 국민이기에 저 정도에서 끝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민생시위가 갑자기 반정부 시위로 바뀌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몸짓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승려들의 역할은. ▲ 미얀마는 전 인구의 85% 이상이 불교도인 대표적인 불교국가 중 하나다. 승려는 국민 사이에 도덕적으로 추앙을 받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이들이 거리로 나섰기 때문에 양곤 시민 10만명이 가두행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승려와 주민들의 가두행진은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였다. 질서정연하게 맨발의 승려들은 거리를 행진하고 주민들은 인간 사슬을 엮어 이들을 보호했다. 민주화의 성지 격인 쉐다곤탑(塔) 주변에서 승려와 주민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릴 때 나도 사진을 찍다 말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야 했다. --진압군은 어떤 모습이었나. ▲ 언론에서 알려진 것처럼 77사단은 외부에서 투입된 부대가 아니다. 수도방위사단으로 항상 양곤에 주재하고 있다. 이들의 폭력이 극히 심했다.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승려와 주민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미얀마에서는 '군인은 사람을 죽여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교육시킨다. 27일에 9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이런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시위대가 급격히 불어나자 미얀마 군정은 1988년 민주화 운동 진압부대인 22사단을 양곤에 투입했다. 군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시위가 군정종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 분명 미얀마 국민은 민주화를 이룩할 것이다. 이번 시위를 통해 항상 수동적이라고만 여겼던 미얀마 국민의 심성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었으며, 민주화에 대한 강한 열망과 저력을 봤다. 지금은 미얀마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미얀마가 민주화되는 날 맨 먼저 미얀마로 달려가겠다. 전성옥 특파원 sungok@yna.co.kr (방콕=연합뉴스)
▲85학번으로 6월 항쟁에 참여했었다. 나는 이번에 미얀마 시위를 지켜보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비슷한 점을 많이 느꼈다. 군부가 언론을 철저히 통제한 점 등이 더욱 그렇다. 광주 항쟁 때도 진실이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다. 이를 영상으로 담아 외부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느껴졌다. 미얀마 군부가 통금령과 집회 금지령을 내린 뒤에도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다녔다. 미얀마에서는 시위 모습을 영상으로 담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이런 나의 모습이 눈에 띄어 체포령이 내려진 것으로 안다. --시위 상황은. ▲급격한 유가 인상으로 촉발된 민생시위는 참여도가 극히 저조했다. 많아야 100여명 정도였다. 시위 주동자들이 체포되자 그마저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45년간 군부 통치 아래 있던 국민이기에 저 정도에서 끝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민생시위가 갑자기 반정부 시위로 바뀌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몸짓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승려들의 역할은. ▲ 미얀마는 전 인구의 85% 이상이 불교도인 대표적인 불교국가 중 하나다. 승려는 국민 사이에 도덕적으로 추앙을 받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이들이 거리로 나섰기 때문에 양곤 시민 10만명이 가두행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승려와 주민들의 가두행진은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였다. 질서정연하게 맨발의 승려들은 거리를 행진하고 주민들은 인간 사슬을 엮어 이들을 보호했다. 민주화의 성지 격인 쉐다곤탑(塔) 주변에서 승려와 주민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릴 때 나도 사진을 찍다 말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야 했다. --진압군은 어떤 모습이었나. ▲ 언론에서 알려진 것처럼 77사단은 외부에서 투입된 부대가 아니다. 수도방위사단으로 항상 양곤에 주재하고 있다. 이들의 폭력이 극히 심했다.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승려와 주민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미얀마에서는 '군인은 사람을 죽여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교육시킨다. 27일에 9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이런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시위대가 급격히 불어나자 미얀마 군정은 1988년 민주화 운동 진압부대인 22사단을 양곤에 투입했다. 군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시위가 군정종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 분명 미얀마 국민은 민주화를 이룩할 것이다. 이번 시위를 통해 항상 수동적이라고만 여겼던 미얀마 국민의 심성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었으며, 민주화에 대한 강한 열망과 저력을 봤다. 지금은 미얀마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미얀마가 민주화되는 날 맨 먼저 미얀마로 달려가겠다. 전성옥 특파원 sungok@yna.co.kr (방콕=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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