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거 결과
대만 새 총통 당선 ‘마잉주’는 누구
“그가 총통에 당선되지 않았으면 영화계의 태산이 되지 않았을까?”
대만 <연합보>는 23일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가 중학생 시절 나뭇가지를 붙잡고 그네를 타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설명을 붙였다. 그가 대만 정치인으로선 유례없는 ‘대중적 인기’를 받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구다. 세련됨과 친화력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로 무장한 그의 등장은 대만 정치에서 권위주의가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본토 출신 부모 둔 외성인…국민당 장학금 미 유학
영어실력 발판 출세길…법무부장 때 부폐척결 인기 그는 1950년 홍콩에서 학도군 출신의 공직자였던 아버지와 중앙은행 외환국장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중국에서 온 외성인과 대만에서 태어난 본성인을 구분하는 대만 정치에선 외성인에 속한다. 이 때문에 그는 선거 과정에서 민진당 지지자들한테서 ‘중국인’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가 내세운 대만과 중국의 공동시장 구상도 대만을 중국에 바치는 것이라는 원색적인 비판을 받았다. 마 당선자는 이런 반발을 의식한 듯 본성인이 많은 대만 남부를 돌 때는 어눌하나마 현지어인 민남어로 연설을 이어갔다. 그가 연설 중간중간에 민남어로 “맞아요, 틀려요?”라고 묻는 모습은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전국의 안방에 전달됐다. 출생지를 따지는 대만판 지역감정의 엄혹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비록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했지만, 대만인들의 통합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대만대 법학과를 나온 그는 국민당의 차세대 지도자가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74년 국민당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가 뉴욕대에서 석사,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이는 그에게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인 감각을 선물했지만, 동시에 ‘친미파’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는 미국 영주권 보유 여부를 둘러싼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1981년 대만으로 돌아온 그는 장징궈 당시 총통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한다. 1994년엔 법무부장에 올라 부패 척결에 나섬으로써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는 이를 무기로 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천수이볜 당시 시장을 꺾는 돌풍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국민당 주석에 올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면서 대권 도전의 관문을 넘어섰다. 국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그의 대중적 인기를 십분 활용한 텔레비전 광고를 쏟아냈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워 민진당을 ‘낡은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일각에선 국민당의 이런 선거전략이 정책보다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의 부인인 저우메이칭 역시 일찍이 대만 정치에서 볼 수 없었던 ‘영부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만정치대 법학과를 나와 뉴욕대에서 유학하던 시절 마 당선자와 연애를 했다는 그는 수수한 단발머리에 청바지 차림으로 유세장을 누볐다. 그는 영부인이 된 뒤에도 법무를 맡은 은행에 계속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대만 <자유시보>는 그를 ‘신여성’이라고 불렀다. 타이베이/유강문 특파원
영어실력 발판 출세길…법무부장 때 부폐척결 인기 그는 1950년 홍콩에서 학도군 출신의 공직자였던 아버지와 중앙은행 외환국장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중국에서 온 외성인과 대만에서 태어난 본성인을 구분하는 대만 정치에선 외성인에 속한다. 이 때문에 그는 선거 과정에서 민진당 지지자들한테서 ‘중국인’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가 내세운 대만과 중국의 공동시장 구상도 대만을 중국에 바치는 것이라는 원색적인 비판을 받았다. 마 당선자는 이런 반발을 의식한 듯 본성인이 많은 대만 남부를 돌 때는 어눌하나마 현지어인 민남어로 연설을 이어갔다. 그가 연설 중간중간에 민남어로 “맞아요, 틀려요?”라고 묻는 모습은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전국의 안방에 전달됐다. 출생지를 따지는 대만판 지역감정의 엄혹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비록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했지만, 대만인들의 통합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대만대 법학과를 나온 그는 국민당의 차세대 지도자가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74년 국민당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가 뉴욕대에서 석사,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이는 그에게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인 감각을 선물했지만, 동시에 ‘친미파’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는 미국 영주권 보유 여부를 둘러싼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1981년 대만으로 돌아온 그는 장징궈 당시 총통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한다. 1994년엔 법무부장에 올라 부패 척결에 나섬으로써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는 이를 무기로 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천수이볜 당시 시장을 꺾는 돌풍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국민당 주석에 올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면서 대권 도전의 관문을 넘어섰다. 국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그의 대중적 인기를 십분 활용한 텔레비전 광고를 쏟아냈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워 민진당을 ‘낡은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일각에선 국민당의 이런 선거전략이 정책보다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의 부인인 저우메이칭 역시 일찍이 대만 정치에서 볼 수 없었던 ‘영부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만정치대 법학과를 나와 뉴욕대에서 유학하던 시절 마 당선자와 연애를 했다는 그는 수수한 단발머리에 청바지 차림으로 유세장을 누볐다. 그는 영부인이 된 뒤에도 법무를 맡은 은행에 계속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대만 <자유시보>는 그를 ‘신여성’이라고 불렀다. 타이베이/유강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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