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상황 고려 결심” TV연설…미 대테러전 변화 예상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쿠데타로 집권한 지 9년 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적극 동참해 온 그의 몰락은 임기가 몇 달 남지 않은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 모습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의 사임으로 파키스탄을 거점으로 한 미국의 서남아 지역 대테러 전선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 예견된 사임=무샤라프는 18일 낮 12시 전국에 생중계된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정국 상황을 고려하고 법률 자문 및 정치 동지들과 상의한 끝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며 “나는 지난 9년 동안 충심으로 모든 업무를 처리했으며, 파키스탄과 국민이 항상 최우선이 되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와 <더 네이션> 등 현지 언론들은 이미 지난주부터 무샤라프가 곧 사임을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집권 연정의 압박 속에 무샤라프가 의회 해산 등 초강경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달 연정을 이끌고 있는 유수프 라자 질라니 총리가 미국 백악관을 방문한 데 이어, 최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무샤라프에 대한 망명지 제공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등 미국이 사실상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무샤라프는 사임 결정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 “탄핵 이유 없다”=무샤라프의 사임 발표는 지난 2월 총선으로 출범한 현 집권 연정이 무샤라프의 탄핵을 추진하려는 시점에 나왔다. 1999년 쿠데타 당시 무샤라프에게 쫓겨난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는 자신이 이끄는 원내 제2당 파키스탄 무슬림리그-나와즈(PML-N) 의석을 거머쥐고, 애초 꾸린 연정에서 탈퇴하는 강수까지 두어가며 제1당인 파키스탄 인민당(PPP)을 압박했다. 온건 성향의 인민당은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사법부 복원 등 무샤라프 탄핵에 필요한 조처에 합의하면서 연정 복원에 성공했다.
반대 세력이 제기하는 무샤라프의 탄핵 사유는 집권 기간 전반에 걸친 ‘위법’ 행위로, △초헌법적 군부 쿠데타 △지난해 대법관들을 해임하는 등의 사법부 탄압 △지난해 랄마스지드(붉은 사원) 점거농성 유혈진압 등이 해당된다. 무샤라프는 이날 연설에서 “나의 미래는 국민들의 손에 맡기겠다”며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모든 파키스탄 국민을 위해 일해 온 만큼, 내게 제기된 어떠한 탄핵 사유도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안갯속 대테러전쟁=파키스탄은 걸프 지역을 드나드는 항로에 놓인데다, 아프가니스탄·이란·중국·인도 등 주요 국가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70~80년대 미국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통해 이슬람권에서 몰려든 이슬람 전사(무자헤딘)들의 ‘성전’(지하드)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9·11 이후 미국은 아프간 탈레반 정권의 축출 과정에서도 파키스탄과 동맹을 맺고 후방 지원을 확보했다. 무샤라프 정권은 이슬람 세력과의 동지애가 아닌 미국과의 동맹을 택했고, 미국 쪽에서 100억달러 이상의 경제지원을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지난해 국내 지지가 높은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와의 ‘권력 분점’을 통해 무샤라프의 정치생명을 ‘보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회생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무샤라프를 ‘용도 폐기’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날 무샤라프의 사임을 발표 뒤 라이스 장관은 “테러리즘과 극단주의에 대한 전쟁에서 가장 헌신적인 파트너 중 하나였다”며 그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미국 정부가 앞으로도 계속 파키스탄 정부와 함께 일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대테러 전쟁의 초점을 이라크에서 아프간으로 서서히 옮기는 가운데 내린 이번 결정 이면에 새 집권 연정과 어떤 거래가 있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외현 조일준 기자 oscar@hani.co.kr
이날 무샤라프의 사임을 발표 뒤 라이스 장관은 “테러리즘과 극단주의에 대한 전쟁에서 가장 헌신적인 파트너 중 하나였다”며 그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미국 정부가 앞으로도 계속 파키스탄 정부와 함께 일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대테러 전쟁의 초점을 이라크에서 아프간으로 서서히 옮기는 가운데 내린 이번 결정 이면에 새 집권 연정과 어떤 거래가 있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외현 조일준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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