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년 만의 실크로드 여행기. 박민희 기자
쉬는 날이나 주말이면, 햇빛 구경도 하지 않는 날이 많다. 집에 웅크리고 앉아 밀린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식구들에게 잔소리하며 지낸다. 그러다, 가끔 그동안 미뤄두었던 여행을 한꺼번에 떠나듯 길을 나선다. 지난해가 그런 때였나 보다. 1년 동안 잠시 일에서 떠나 있었고, 여행에 미친 듯 시간이 날 때마다 배당을 매고 떠나곤 했다. 혼자 계획을 짜고 표를 끊고 숙소에 전화를 걸어 가격을 흥정하고 예약을 하고 딸과 함께 붐비는 베이징 서역에서 중국 사람들 틈에 끼어 야간열차에 오르는 게 버릇처럼 됐다. 낯선 곳에 내려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으로 큰숨을 들이쉬고 여행책을 보고 낯선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장(新疆), ‘새로운 영토’라는 밋밋한 이름이 붙은 중국 서쪽 끝의 거대한 땅, 난 왠지 이곳과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일요일 아침마다 멍하니 빠져 있었던 <실크로드> 다큐멘터리 때문일 수도 있고, 대학시절 한 강의에 빠져 신장 역사를 전공하려는 객기를 부리던 시절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대학원 시절 정말로 꿈같이 신장에 간 적이 있었다. 베이징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한 친구를 우연히 만났고, 우연히 우리 둘다 신장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여자애 둘이서 정말 한여름 사막의 도시들로 떠나게 됐다. 지금은 신장 관광산업이 거의 한국인들에 의존해 먹고 사는 상황이지만,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지 만 2년도 되지 않았던 1994년엔 마치 ‘지구의 반대편 끝’으로 가는 여행처럼 느껴졌다. 위구르와 카자흐 사람들의 모습, 사막에서 타이어가 펑크나기도 하고, 둔황 막고굴에서 배탈이 나는 바람에 눈앞이 노래졌던 산전수전의 사건들, 폐허가 돼 버려진 고대 도시들, 끝없이 펼쳐진 투르판의 포도밭들… 내가 알던 세상과 너무 달라보였던 신장에 매혹됐다.
그래서, ‘다시 신장에 가겠다’는 게 입버릇처럼 됐다. 딸이 태어난 뒤로는 “같이 신장에 가자”를 주문처럼 외웠다. 그리고, 지난해 6월 어느날 어스름이 내리던 무렵, 우리 모녀는 드디어 신장에서도 서쪽 끝에 위치한 카슈가르에 내렸다. 카슈가르에 내린 뒤 몇군데 전화를 걸어 수소문한 끝에 다음날 우리를 파키스탄 국경쪽 파미르 고원 지대로 데려다줄 가이드, 무스타파(가명)를 구했다. 한밤 중에 마지막 예배를 마치고 헐레벌떡 달려온 그와 계약서를 쓰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카슈카르엔 모래폭풍이 노랗게 깔려 있었다.
우리가 향하는 파미르 고원 지대는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달려 중국과 파키스탄을 이어주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해발 3000~4000m의 세계에서 제일 높은 도로중 하나다. 도중에 이 아저씨가 우리를 배신해 버리고 가거나 헤꼬지를 하면 어쩌지 하던 두려움은 출발한지 한시간도 안돼 사라져버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너무나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고 마음이 열렸다. 아저씨가 틀어준 위구르 음악에 맞춰 뒷자석의 나와 딸은 춤을 추며 세계의 지붕을 향해 달려갔다. 카슈가르에서 위구르 마을들을 지나 서쪽으로 달려가며 만난 세계는 황량하기도, 웅장하기도, 신비롭기도 했다. 길 양 옆으로 해발 7천m가 넘는 설산, 무스타크 아타와 콩쿠르산이 펼쳐졌다. 그 길의 한가운데, 검은 호수라는 뜻의 카라쿨 호수가 있다. 한여름에도 산중턱까지 만년설을 인 설산 아래 깊은 물이 하늘 빛에 따라 환하게 빛나기도, 검게 변하기도 한다. 키르기즈 유목민 몇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 원래는 무스타크 아타 설산 중턱에서 유목을 하지만,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여름이면 여기서 기념품도 팔고 양도 치며 산다고 했다. 무스타파와 친한 한 가족의 유르트로 들어갔다. 딸은 그 집 아이들이랑 같이 바닥에 뒹굴기도 하고 호수에서 아이들이랑 장난을 치기도 하고, 양과 낙타를 쫓아다니기도 한다.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차와 빵을 내놨고, 주인 아저씨는 막 새로 사왔다는 텔레비전으로 키르기즈 유행음악들을 들려주는 동안 시간은 한없이 나른하고 한가롭게 흘러갔다. 호수 주변을 따라 설산을 바라보며 걷는 동안 주변은 고요하고, 한없이 평화로웠다. 다시 길을 떠나 오아시스 마을들과 여러 번의 여권검사와 검문을 거친 끝에 찾아간 타쉬쿠르간은 페르시아계 주민인 타지크인들의 땅이다. 타쉬쿠르간은 돌성이란 뜻인데 실제로 마을 한가운데 다 허물어진 돌성이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과 파키스탄과 가까운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들이 들려가던 주요한 기착점이었다. 중국 한나라 시대인 2천년 전부터 이곳엔 왕국이 있었고, 이후에도 여러 페르시아계 왕국들의 수도로 번영했다. 13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채 남아있는 돌성 모양은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오는 성이 조금 더 허물어지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찾아오는 이들도 별로 없이 버려진 것 같은 돌성에 오르면 발 아래 펼쳐진 초원 위에 점점이 흩어진 양과 소들이 눈부시게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역시 침묵 속에 오래 전 이곳에 살며 실크로드 역사의 한자락을 써나갔을 사람들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인근에는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폐허가 된 채 서 있다. 물론 지금의 주민들은 모두 이슬람 교도들로 마을 어귀에 작은 모스크들이 서 있다. 다음날 아침 파키스탄 국경으로 이어지는 중국쪽 마지막 마을인 타쉬쿠르간을 출발해 국경까지 가려고 길을 나섰다. 국경수비대 관리는 “올림픽 성화 봉송기간이라 못간다. 지난 한달 동안 중국인들도 출입금지다”라고 하더니 “한국인이냐, 중국인인줄 알았다, 한국도 옛날에는 중국 땅이었다”이었다는 말을 내뱉는다. “아니다, 한국과 중국은 다른 나라이며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해주고 돌아나오면서, 나와 무스타파는 의기 투합했다. 우리는 “중국인들은 어디나 자기땅이라고 우긴다”라며 분노를 삭혔다. 무스타파는 정치적이라거나, 독립을 위해 총을 잡을 사람은 전혀 아니다.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소박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와 며칠 동안 여행하는 동안 언뜻언뜻 위구르인들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카슈가르로 돌아와 여행책자마다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라고 적혀 있는 아팍 호자묘를 보러 갔을 때였다. 19세기 이 지역엔 흑산당과 백산당으로 불리는 두 종교 집단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그중 아팍 호자 가문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청나라의 힘을 업고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됐던 사람들이다. 이 일족 중 한명인 향비는 몸에서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건륭제의 후궁이 됐으나 비수를 가슴에 품고 절개를 지키다가 황제 모친의 강압에 자결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건륭제 후비들 중 유일한 위구르 여인은 용비(容妃)로, 1758년 청의 신장 점령 때 청의 정복을 도운 아팍 호자 가문의 일족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다가 청조의 릉에 묻혔다. 향비의 전설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인 셈이다. 아팍 호자묘를 보고 나와 “무스타파, 왜 아팍 호자묘가 카슈가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거지? 내 생각에는 위구르인들이 좋아할 곳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무심코 말을 꺼냈다. 그가 몹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맞아, 위구르인들은 절대 거기 가지 않아, 거긴 중국 사람들이나 좋아할 만한 곳이야, 아팍 호자 일족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땅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중국인들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신장으로 진격하기 전 이곳에 있었던 동투르키스탄무슬림공화국(1944~1945)을 “우리의 마지막 국가”라고 불렀다. 그는 중국의 지배에 대해 “종교도 믿지 못하게 하고 굶주림도 심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비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자원을 다 파내가는 중국인들에 대해 분노한다”고 했다.
위구르인들이 천년 넘게 지켜온 카슈가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이어주던 실크로드의 주요한 거점으로, 수천년 동안 교역으로 번영했던 도시다. 대상들은 이곳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쪽 소그디아나나 비잔틴제국으로 가거나 남쪽으로 내려가 인도 서북부로 향했다. 18세기 중국 청나라에 점령됐지만 19세기말 이곳에 대한 중국의 통제는 흔들렸다. 유라시아 대륙을 둘러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는 카슈가르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이곳을 자신의 세력권 아래 두기 위해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가 묵었던 치니바그 호텔은 영국 영사관이 있었던 곳이고, 써만빈관은 러시아 영사관이었던 곳이다. 이들이 남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이 때 이곳에는 야쿱 벡이라는 ‘군주’와 위구르인들의 국가가 있었다. 1949년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신장에 인민해방군을 진주시켰다. 당시 동투르키스탄의 지도부는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렸고, 중국의 힘이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주화파가 승리해 중국 정부에 항복했다. 주전파는 터키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중국은 이들을 ‘분리주의자’ ‘테러리스트’로 비난한다. 카슈가르에는 수만명이 모이는 일요시장과 모스크 등도 있지만, 이 도시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람들이었다. 카슈가르 올드타운의 미로같은 골목길, 아이들은 달려나와 웃으며 수줍게 사진을 찍었고, 우리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얼음과자도 먹고 동네 구경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 무렵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듯한 집 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자, 야무진 위구르 아가씨가 들어오고 싶냐고 말을 건다. 들어가도 되냐고 하자, 오늘은 다 환영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되지 않았지만, 들어가보니 동네잔치 분위기다. 나는 식당인줄 알고 메뉴판을 달라고 하자 사람들은 메뉴판은 없다고 했다. 한참 지나고 보니 오늘 결혼식이 벌어지고 있고 이방인인 우리는 하객으로 초청된 것이다. 그들이 내주는 피로연 음식을 먹고, 주인 아주머니가 이끄는 대로 집안을 구경하고 있자, 곧 신랑이 신부를 데려가기 위해 왔다. 흥겨운 음악,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을 무등 태우고 마당을 돈다. 정든 집을 떠나는 신부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방인에게도 금새 마음을 열어 손님으로 받아주고, 환한 웃음을 보여주는 위구르인들의 오랜 삶의 터전인 카슈카르의 올드타운은 곧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얼마 전 <워싱턴 포스트>는 카슈카르 지방 정부가 최근 올드타운이 낡아 안전 위험이 있다며, 이곳을 철거하고 재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그나마 한족들의 거대한 이주 행렬에 밀려 자신들의 땅에서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는 위구르인들의 ‘마음의 고향’은 개발 논리와 민족갈등의 거대한 불도우저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카슈가르를 떠나오기 전 우리는 11세기 위구르 문법을 정리한 학자 모하메드 카슈가리와 그와 동시대의 대표적 위구르 시인 유수프 하스 하지프의 능묘를 찾아갔다. 위구르인들의 문화적 전성기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모하메드 카슈가리의 능묘 근처에는 사람들이 오후의 더위를 피해 나무 밑에 앉아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있어 왠지 한자락 끼고 싶은 분위기였다. 외국인이 별로 없는 곳이라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쿠리’라고 대답하니 다들 손을 치켜들며 반갑게 웃는다. 유수프 하지프의 묘에는 우리말고는 관광객이 한명도 없었다. 젊은 위구르인 안내원은 우리에게 이 중세 시인의 위대함에 대해, 위구르 건축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가 중세 위구르어로 읽어주는 시는 음악 같았다. 비록 뜻은 그 옆에 쓰여진 중국어와 영어 설명으로 대충 짐작할 수 밖에 없었지만. 카슈가르를 떠나면서 나와 딸은 많이 울었다. 이 숨막히게 아름다운 자연, 이 한없이 나른하고 여유로운 일상 생활 아래 큰 역사적 상처들과 빈곤, 정체성의 혼란과 미래에 대한 막막함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 소박한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게 너무 아팠다. 그 뒤로, 우린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알타이 산악지역의 카나스호도 갔고, 우루무치 와 투르판에도 찾아갔다. 14년 전 내가 보았던 신장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우루무치는 이미 한족이 위구르인들을 몰아낸 대도시다. 도시 한켠에 위구르인 마을이 있지만, 곳곳의 고층빌딩은 대부분 한족들의 경제적 기반이다. 14년 전 도시 한 가운데 거리마다 포도시렁 사이로 위구르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마을이었던 투르판 중심가도 이젠 중국의 보통 시골 도시처럼 변했다. 포도시렁은 도시 밖으로 한참 버스를 타고 나가야 볼 수 있고, 일부 지역은 엄청나게 비싼 입장료를 낸 뒤에야 들어갈 수 있다.
투르판의 아스타나 무덤은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기 전 위구르인들이 불교왕국을 이루고 있던 있던 시절의 왕과 귀족들이 묻혔던 거대한 고분군이 있는 곳이다. 신장박물관의 흥미로운 유적 중 많은 것들이 이곳 무덤에서 출토됐다. 건조한 지대라 미라도 많이 발굴된다. 14년 전과 완전히 달라진 것은, 무덤 입구에 들어선 거대한 복희와 여와 상이다. 한족들의 창조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위구르인들의 역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다. 위구르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천산 천지 주변에도 중국 고대 설화에 나오는 서왕모의 거대한 사당이 세워졌다. 14년 전에는 전혀 없었던 모습이다. 중국인 가이드들은 중국인 관광객을 향해 이곳에서 서왕모와 그의 연인이 어떻게 만나 사랑을 나눴는지 전설을, 산 곳곳의 바위와 호수, 천지 등을 무대로 자세히 풀어낸다. 이제 위구르인들의 땅과 역사는 중국의 땅과 역사 속으로 빠르게 흡수돼 가고 있었다. 투르판과 일리 계곡 지역 곳곳에 셀 수 없이 많은 석유굴착기가 고개를 까딱까닥하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신장의 석유를 뽑아내고 있다. 중국 어느 지역보다도 잘 닦인 새 고속도로는 이 자원들을 중국 동부 지역으로 쉼 없이 실어나른다. 이전과 비교해, 훨씬 많은 위구르인들이 중국어를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변화였다 나는 신장에서 중국은 악이고, 위구르는 선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바라보고 싶지 않다. 오래 전부터 한족과 유목민의 문화가 이곳에서 대립하고 융화된 적도 있었고, 중국에서 독립하겠다며 무장투쟁에 나선 위구르인들도 많지만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으려는 위구르인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구르인들의 땅이자 그들의 역사와 전통이 어려있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한족의 논리로 재단하고 약자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는 상황은 양쪽 모두의 마음 속에 ‘분리장벽’과 미움을 쌓게 될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항상 내 심장을 뛰게하는 이곳, 세계에서 가장 ‘오지’로 여겨지는 유라시아의 심장부, 그러나, 이곳을 통해 세상의 어느 곳으로라도 이어질 것 같은 길, 우리가 길로만 여기는 곳이 삶의 터전이며 그 곳곳에서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존엄을 지키고 싶어하는 이 사람들..... 언젠가 운명처럼, 그들을, 그 땅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들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까?

14년 만의 실크로드 여행기. 박민희 기자
우리가 향하는 파미르 고원 지대는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달려 중국과 파키스탄을 이어주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해발 3000~4000m의 세계에서 제일 높은 도로중 하나다. 도중에 이 아저씨가 우리를 배신해 버리고 가거나 헤꼬지를 하면 어쩌지 하던 두려움은 출발한지 한시간도 안돼 사라져버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너무나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고 마음이 열렸다. 아저씨가 틀어준 위구르 음악에 맞춰 뒷자석의 나와 딸은 춤을 추며 세계의 지붕을 향해 달려갔다. 카슈가르에서 위구르 마을들을 지나 서쪽으로 달려가며 만난 세계는 황량하기도, 웅장하기도, 신비롭기도 했다. 길 양 옆으로 해발 7천m가 넘는 설산, 무스타크 아타와 콩쿠르산이 펼쳐졌다. 그 길의 한가운데, 검은 호수라는 뜻의 카라쿨 호수가 있다. 한여름에도 산중턱까지 만년설을 인 설산 아래 깊은 물이 하늘 빛에 따라 환하게 빛나기도, 검게 변하기도 한다. 키르기즈 유목민 몇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 원래는 무스타크 아타 설산 중턱에서 유목을 하지만,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여름이면 여기서 기념품도 팔고 양도 치며 산다고 했다. 무스타파와 친한 한 가족의 유르트로 들어갔다. 딸은 그 집 아이들이랑 같이 바닥에 뒹굴기도 하고 호수에서 아이들이랑 장난을 치기도 하고, 양과 낙타를 쫓아다니기도 한다.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차와 빵을 내놨고, 주인 아저씨는 막 새로 사왔다는 텔레비전으로 키르기즈 유행음악들을 들려주는 동안 시간은 한없이 나른하고 한가롭게 흘러갔다. 호수 주변을 따라 설산을 바라보며 걷는 동안 주변은 고요하고, 한없이 평화로웠다. 다시 길을 떠나 오아시스 마을들과 여러 번의 여권검사와 검문을 거친 끝에 찾아간 타쉬쿠르간은 페르시아계 주민인 타지크인들의 땅이다. 타쉬쿠르간은 돌성이란 뜻인데 실제로 마을 한가운데 다 허물어진 돌성이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과 파키스탄과 가까운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들이 들려가던 주요한 기착점이었다. 중국 한나라 시대인 2천년 전부터 이곳엔 왕국이 있었고, 이후에도 여러 페르시아계 왕국들의 수도로 번영했다. 13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채 남아있는 돌성 모양은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오는 성이 조금 더 허물어지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찾아오는 이들도 별로 없이 버려진 것 같은 돌성에 오르면 발 아래 펼쳐진 초원 위에 점점이 흩어진 양과 소들이 눈부시게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역시 침묵 속에 오래 전 이곳에 살며 실크로드 역사의 한자락을 써나갔을 사람들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인근에는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폐허가 된 채 서 있다. 물론 지금의 주민들은 모두 이슬람 교도들로 마을 어귀에 작은 모스크들이 서 있다. 다음날 아침 파키스탄 국경으로 이어지는 중국쪽 마지막 마을인 타쉬쿠르간을 출발해 국경까지 가려고 길을 나섰다. 국경수비대 관리는 “올림픽 성화 봉송기간이라 못간다. 지난 한달 동안 중국인들도 출입금지다”라고 하더니 “한국인이냐, 중국인인줄 알았다, 한국도 옛날에는 중국 땅이었다”이었다는 말을 내뱉는다. “아니다, 한국과 중국은 다른 나라이며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해주고 돌아나오면서, 나와 무스타파는 의기 투합했다. 우리는 “중국인들은 어디나 자기땅이라고 우긴다”라며 분노를 삭혔다. 무스타파는 정치적이라거나, 독립을 위해 총을 잡을 사람은 전혀 아니다.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소박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와 며칠 동안 여행하는 동안 언뜻언뜻 위구르인들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14년 만의 실크로드 여행기. 박민희 기자
카슈가르로 돌아와 여행책자마다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라고 적혀 있는 아팍 호자묘를 보러 갔을 때였다. 19세기 이 지역엔 흑산당과 백산당으로 불리는 두 종교 집단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그중 아팍 호자 가문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청나라의 힘을 업고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됐던 사람들이다. 이 일족 중 한명인 향비는 몸에서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건륭제의 후궁이 됐으나 비수를 가슴에 품고 절개를 지키다가 황제 모친의 강압에 자결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건륭제 후비들 중 유일한 위구르 여인은 용비(容妃)로, 1758년 청의 신장 점령 때 청의 정복을 도운 아팍 호자 가문의 일족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다가 청조의 릉에 묻혔다. 향비의 전설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인 셈이다. 아팍 호자묘를 보고 나와 “무스타파, 왜 아팍 호자묘가 카슈가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거지? 내 생각에는 위구르인들이 좋아할 곳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무심코 말을 꺼냈다. 그가 몹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맞아, 위구르인들은 절대 거기 가지 않아, 거긴 중국 사람들이나 좋아할 만한 곳이야, 아팍 호자 일족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땅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중국인들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신장으로 진격하기 전 이곳에 있었던 동투르키스탄무슬림공화국(1944~1945)을 “우리의 마지막 국가”라고 불렀다. 그는 중국의 지배에 대해 “종교도 믿지 못하게 하고 굶주림도 심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비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자원을 다 파내가는 중국인들에 대해 분노한다”고 했다.
위구르인들이 천년 넘게 지켜온 카슈가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이어주던 실크로드의 주요한 거점으로, 수천년 동안 교역으로 번영했던 도시다. 대상들은 이곳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쪽 소그디아나나 비잔틴제국으로 가거나 남쪽으로 내려가 인도 서북부로 향했다. 18세기 중국 청나라에 점령됐지만 19세기말 이곳에 대한 중국의 통제는 흔들렸다. 유라시아 대륙을 둘러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는 카슈가르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이곳을 자신의 세력권 아래 두기 위해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가 묵었던 치니바그 호텔은 영국 영사관이 있었던 곳이고, 써만빈관은 러시아 영사관이었던 곳이다. 이들이 남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이 때 이곳에는 야쿱 벡이라는 ‘군주’와 위구르인들의 국가가 있었다. 1949년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신장에 인민해방군을 진주시켰다. 당시 동투르키스탄의 지도부는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렸고, 중국의 힘이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주화파가 승리해 중국 정부에 항복했다. 주전파는 터키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중국은 이들을 ‘분리주의자’ ‘테러리스트’로 비난한다. 카슈가르에는 수만명이 모이는 일요시장과 모스크 등도 있지만, 이 도시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람들이었다. 카슈가르 올드타운의 미로같은 골목길, 아이들은 달려나와 웃으며 수줍게 사진을 찍었고, 우리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얼음과자도 먹고 동네 구경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 무렵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듯한 집 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자, 야무진 위구르 아가씨가 들어오고 싶냐고 말을 건다. 들어가도 되냐고 하자, 오늘은 다 환영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되지 않았지만, 들어가보니 동네잔치 분위기다. 나는 식당인줄 알고 메뉴판을 달라고 하자 사람들은 메뉴판은 없다고 했다. 한참 지나고 보니 오늘 결혼식이 벌어지고 있고 이방인인 우리는 하객으로 초청된 것이다. 그들이 내주는 피로연 음식을 먹고, 주인 아주머니가 이끄는 대로 집안을 구경하고 있자, 곧 신랑이 신부를 데려가기 위해 왔다. 흥겨운 음악,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을 무등 태우고 마당을 돈다. 정든 집을 떠나는 신부는 울음을 터뜨렸다.

14년 만의 실크로드 여행기. 박민희 기자
이방인에게도 금새 마음을 열어 손님으로 받아주고, 환한 웃음을 보여주는 위구르인들의 오랜 삶의 터전인 카슈카르의 올드타운은 곧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얼마 전 <워싱턴 포스트>는 카슈카르 지방 정부가 최근 올드타운이 낡아 안전 위험이 있다며, 이곳을 철거하고 재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그나마 한족들의 거대한 이주 행렬에 밀려 자신들의 땅에서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는 위구르인들의 ‘마음의 고향’은 개발 논리와 민족갈등의 거대한 불도우저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카슈가르를 떠나오기 전 우리는 11세기 위구르 문법을 정리한 학자 모하메드 카슈가리와 그와 동시대의 대표적 위구르 시인 유수프 하스 하지프의 능묘를 찾아갔다. 위구르인들의 문화적 전성기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모하메드 카슈가리의 능묘 근처에는 사람들이 오후의 더위를 피해 나무 밑에 앉아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있어 왠지 한자락 끼고 싶은 분위기였다. 외국인이 별로 없는 곳이라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쿠리’라고 대답하니 다들 손을 치켜들며 반갑게 웃는다. 유수프 하지프의 묘에는 우리말고는 관광객이 한명도 없었다. 젊은 위구르인 안내원은 우리에게 이 중세 시인의 위대함에 대해, 위구르 건축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가 중세 위구르어로 읽어주는 시는 음악 같았다. 비록 뜻은 그 옆에 쓰여진 중국어와 영어 설명으로 대충 짐작할 수 밖에 없었지만. 카슈가르를 떠나면서 나와 딸은 많이 울었다. 이 숨막히게 아름다운 자연, 이 한없이 나른하고 여유로운 일상 생활 아래 큰 역사적 상처들과 빈곤, 정체성의 혼란과 미래에 대한 막막함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 소박한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게 너무 아팠다. 그 뒤로, 우린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알타이 산악지역의 카나스호도 갔고, 우루무치 와 투르판에도 찾아갔다. 14년 전 내가 보았던 신장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우루무치는 이미 한족이 위구르인들을 몰아낸 대도시다. 도시 한켠에 위구르인 마을이 있지만, 곳곳의 고층빌딩은 대부분 한족들의 경제적 기반이다. 14년 전 도시 한 가운데 거리마다 포도시렁 사이로 위구르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마을이었던 투르판 중심가도 이젠 중국의 보통 시골 도시처럼 변했다. 포도시렁은 도시 밖으로 한참 버스를 타고 나가야 볼 수 있고, 일부 지역은 엄청나게 비싼 입장료를 낸 뒤에야 들어갈 수 있다.

14년 만의 실크로드 여행기. 박민희 기자
투르판의 아스타나 무덤은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기 전 위구르인들이 불교왕국을 이루고 있던 있던 시절의 왕과 귀족들이 묻혔던 거대한 고분군이 있는 곳이다. 신장박물관의 흥미로운 유적 중 많은 것들이 이곳 무덤에서 출토됐다. 건조한 지대라 미라도 많이 발굴된다. 14년 전과 완전히 달라진 것은, 무덤 입구에 들어선 거대한 복희와 여와 상이다. 한족들의 창조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위구르인들의 역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다. 위구르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천산 천지 주변에도 중국 고대 설화에 나오는 서왕모의 거대한 사당이 세워졌다. 14년 전에는 전혀 없었던 모습이다. 중국인 가이드들은 중국인 관광객을 향해 이곳에서 서왕모와 그의 연인이 어떻게 만나 사랑을 나눴는지 전설을, 산 곳곳의 바위와 호수, 천지 등을 무대로 자세히 풀어낸다. 이제 위구르인들의 땅과 역사는 중국의 땅과 역사 속으로 빠르게 흡수돼 가고 있었다. 투르판과 일리 계곡 지역 곳곳에 셀 수 없이 많은 석유굴착기가 고개를 까딱까닥하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신장의 석유를 뽑아내고 있다. 중국 어느 지역보다도 잘 닦인 새 고속도로는 이 자원들을 중국 동부 지역으로 쉼 없이 실어나른다. 이전과 비교해, 훨씬 많은 위구르인들이 중국어를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변화였다 나는 신장에서 중국은 악이고, 위구르는 선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바라보고 싶지 않다. 오래 전부터 한족과 유목민의 문화가 이곳에서 대립하고 융화된 적도 있었고, 중국에서 독립하겠다며 무장투쟁에 나선 위구르인들도 많지만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으려는 위구르인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구르인들의 땅이자 그들의 역사와 전통이 어려있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한족의 논리로 재단하고 약자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는 상황은 양쪽 모두의 마음 속에 ‘분리장벽’과 미움을 쌓게 될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항상 내 심장을 뛰게하는 이곳, 세계에서 가장 ‘오지’로 여겨지는 유라시아의 심장부, 그러나, 이곳을 통해 세상의 어느 곳으로라도 이어질 것 같은 길, 우리가 길로만 여기는 곳이 삶의 터전이며 그 곳곳에서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존엄을 지키고 싶어하는 이 사람들..... 언젠가 운명처럼, 그들을, 그 땅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들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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