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홋카이도 작은 절서 보관중
“한국인 유골 분명치 않으면
일본 정부 아무 조치도 안해”
“한국인 유골 분명치 않으면
일본 정부 아무 조치도 안해”
일본 홋카이도는 일제 강점기 때 규슈 후쿠오카현과 함께 조선인 강제동원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약 15만명이 끌려가 공식기록만으로도 2300명이 현지에서 희생된 것으로 나온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 해방 65년을 맞았지만 우리는 희생자들의 유골이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는지 온전히 파악을 못하고 있다.
홋카이도 중부에 있는 작은 절에서 한 조선인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연고 유골함과 마주쳤다. 지난 6월29일 조선인 강제연행을 조사하는 활동가들과 함께 히가시카구라정의 몬묘(聞名)사란 사찰을 찾았다. 선대 주지의 부인 후지카미 기미코(88)가 보자기로 싼 목제 유골함 두개를 갖고 나와 보관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가 남편과 함께 이 절에 온 것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3년이었다. 그 이듬해 한기가 느껴지던 무렵 10여명의 남자들이 주검 1구를 메고 절로 찾아왔다. 손발을 닦으라고 물을 데워 대야에 담아 주었는데 짚으로 만든 장갑을 벗은 그들의 손은 흙투성이였다. 그들이 어쩌다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감시원으로 보이는 일본인이 동행했다. 화장을 해서 유골은 절에 안치했다.
펜치와 드라이버로 목제함을 힘겹게 열자 유골이 나왔다. 뼈는 1944년 10월15일치와 19일치 <홋카이도신문>에 싸여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신문종이에는 당시의 긴박한 전황 기사가 실려 있었다. 후지카미 할머니는 “아주 말끔한 뼈”라며 “이 정도면 젊고 몸이 건장한 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뭔가 단서가 있으면 고향에 보내주고 싶지만 아무것도 없어 이제껏 무연고 유골로 보관해왔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10일께 후생성 직원이 종단 관계자와 함께 몬묘사를 방문했다고 한다. 후지카미가 무연고 유골을 얘기하자 후생성 직원은 “우리는 ‘한국인 유골’을 찾고 있다”며 변변히 확인하지도 않고 돌아갔다. ‘에오로시발전소·주베쓰천 유수지 조선인 강제연행·동원의 역사를 캐는 모임’의 회장 곤도 노부오 변호사는 “한국인 유골이라는 것이 명백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일본 정부의 태도”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유골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는 확실한 단서는 없다. 그러나 만일 일본인이라면 절에 보관된 과거장에 이름과 출신지가 분명하게 기록되고 향리에 유골이 전달됐을 것이다. 감시원이 따라왔고, 주검을 메고 온 사람들이 일본어를 쓰지 않았으며, 근처 에오로시댐 현장에 조선인이 많았다는 정황으로 보면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다.
유골함은 66년 만에 열렸지만 유골은 여전히 마지막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시작된 일본 정부의 유골 조사가 얼마나 무성의하게 진행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비친다. 강점 100년을 맞는 한-일 과거사 정리의 현주소다.
히가시카구라/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일본 몬묘사에서 보관해온 목제 유골함. 유골은 전쟁 기사로 빼곡히 채워진 신문에 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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