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배고픔에 시달리는 이재민
신분증 없으면 구호품도 못받아
신분증 없으면 구호품도 못받아
알라 라크히는 파키스탄 역사상 최악의 홍수를 피해 오던 중 길가에서 딸을 출산했다. 그는 고향에서 남부 주요도시 수쿠르까지 60㎞ 길을 내내 걸어왔다. 라크히가 길가에서 딸을 낳을 때 의사는 없었다. 수쿠르에 도착해서도 산모인 그는 나무 밑 지저분한 매트 위에서 간신히 쉴 수 있었다.
<비비시>(BBC)가 최근 전한 파키스탄 홍수 피해 이재민들의 실상은 참혹했다. 라크히가 낳은 갓난아기인 딸은 컵받침에 머리를 힘겹게 눕히고 있었으며, 숨쉬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허약해 보였다고 <비비시>는 전했다. <비비시> 기자가 모녀가 있는 곳부터 몇분 거리에서 의사를 발견했으나, 의사는 수많은 환자들에 둘러싸여 정신이 없었다. 기자가 의사에게 갓난아기를 진료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자, 의사는 “환자가 너무 많다”며 “노력해보겠다”고만 말했다. 다음날 다행히 의사는 라크히의 딸을 진찰했고, 딸은 한결 나아졌다. 라크히는 그제야 딸 이름을 “사미나라고 부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홍수 이재민 캠프에서 위태로운 생명은 사미나 같은 갓난아기들뿐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이들이다. 이재민 캠프에서 구호품 배급은 신분증이 있어 이재민 등록이 가능한 사람에 한해 남녀로 나눠 줄을 세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나도 한꺼번에 구호품 차량에 뛰어들어 큰 혼란이 일기 때문이다. 서둘러 집에서 빠져나오느라 신분증조차 챙기지 못한 사람들은 구호품 배급조차 받지 못하기 일쑤다. <비비시>는 수쿠르 지역 한 이재민 캠프에서 나이 든 여성 한 명이 앞으로 나서려다가 몽둥이를 휘두르는 이재민 캠프 관리자들에게 밀려 쫓겨나는 모습을 전했다. 쫓겨난 여성은 얼굴을 가리고 “신이여 우리를 도와주소서”라며 흐느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먹지 못했어요. 왜 나에겐 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는 거죠?” 근처에는 너덜너덜한 옷을 걸치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나이 든 여성 2명이 더 있었으며, 그들은 눈도 보이지 않고 지팡이에 의지해야 걸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고 <비비시>는 전했다.
마지막까지 재산을 지키기 위해 홍수 피해지역에 남은 이들은 구호품 상자가 떨어지길 기다려, 헤엄쳐 받으러 가야 한다. 파키스탄 정부는 헬리콥터 등을 이용해 구호품을 전달하고 있지만, 헬리콥터는 피해지역에 착륙하지 않는다. 헬리콥터가 착륙할 만한 마른 땅도 거의 없거니와, 착륙하면 주민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각종 사고가 발생하기 쉽기 때문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말마따나 파키스탄 홍수는 “인도양 쓰나미의 슬로모션”격이다. 피해를 입은 이가 2000만명으로 아이티 지진과 인도양 쓰나미를 모두 합한 것보다 전체 피해가 크다. 홍수는 서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해가고 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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